간도 의란구 지방에는 조선인 교육기관이 10여 개소에 달하였고,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이 수십 명이나 되었지만, 교육자들을 위한 수양 기관이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한 몇몇 유지들이 주태규(朱泰奎) 집에서 의란구 교육자대회 발기회를 개최하였다.
여러 가지 사항을 토의하였는데, 동 회에서는 1927년 1월 30일에 창립총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며 회비는 매월 1원으로 정하였고, 동 교육자 대회를 상설기관으로 설립하기로 하여 지난 5일부터 교육자 순회강연대를 조직하여 15일간 예정으로 의란구를 순회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연사는 허원규(許元奎), 유지원(劉志遠), 김양훈(金亮勳), 최영석(崔英錫)으로 결정되었다.
1927년 8월 20일, 노도구에서는 최재형(崔在亨)의 사회로 간도교육자대회를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선언 강령과 발기 취지문을 설명하였으며, 상무위원과 학무위원을 선거하고 구역 편성과 각 구역 학교 조사는 상무위원에게 일임하기로 결정하고 산회하였다.
강령으로는, "첫째, 우리는 00적 교육제도를 00하고 조선 아동의 필요한 교육을 실시함. 둘째 ,우리는 민족적 정신을 교양하여 실질적 국민을 양성함."이었다.
1929년 중국 지방 당국에서 간민교육연구회를 봉쇄하고 해산시켰는데, 이에 대해 간도 지역 한인 교육자들은 간도 조선인 교육자대회를 개최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해 9월 27일 대성중학교에서 간도교육자대회를 개최하기로 협의하고 한여옥, 김봉협, 송봉욱, 한영지, 전국래, 윤홍제, 김광묵 등 7인을 위원으로 선출하였다.
1929년 10월 간도지역 사립학교 폐쇄 문제에 대하여 간도교육자대회를 개최하기로 각 지방에 통지를 하였지만, 일본 영사관에서 이를 압수하고 동흥중학교 교원 송봉욱을 검거하였다. 이에 간도교육자대회는 정세가 안정될 때까지 무기한 연기를 결정하게 되었다.
1920년대 간도 지역 한인 자제 교육을 위한 교육자들의 모임으로서 전 간도 지역에 산재해 있는 교육회를 활용하여 민족운동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일제의 방해로 중단되기는 하였지만, 민족교육기관의 지속적인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은 높이 평가받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