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정갑(白正甲)은 1919년 5월 22일 평안북도 용천 출신으로,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재학 중 1944년 1월 학도병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으나 탈출하여 광복군에 들어가 장교로 항일 무장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
백정갑은 중국 쉬저우〔徐州〕 지역의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 제3지대에 도착하였으며, 한국광복군훈련반 간부 훈련 교육을 수료하였다. 한국광복군훈련반은 안후이성〔安徽省〕 푸양〔阜陽〕에서 활동하던 한국광복군 징모 제6분처에서 설치 운영한 임시 훈련소였다. 장준하‧ 김준엽‧노능서‧윤경빈 등과 함께 교육받았으며, 1944년 11월 린촨〔臨川〕을 출발하여 그다음 해 1월 충칭〔重慶〕에 도착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 경위대(警衛隊)에서 활동하였다. 경위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내무부 소속이었고, 주로 임시정부 청사와 요인들의 경호를 담당하였다. 1945년 2월에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부관처 부관(副官)에 임명되었다. 광복군 대위로서 임시정부에서 운영하는 토교대(土橋隊)에서 활동하였다. ‘토교’는 충칭시 임시정부 청사에서 남쪽으로 20㎞ 정도 떨어진 곳으로, 주로 임시정부와 관련된 인사들의 가족들이 거처하던 곳이었다. 백범 김구(金九)의 둘째 아들 김신(金信)도 이곳에서 거주하였다.
토교대는 광복군의 편제상 정규 조직은 아니었다. 임시정부가 충칭으로 이전한 후 충칭에도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과 한국광복군훈련반 출신들과 중국군에 포로가 된 한적병사(韓籍兵士) 등 한인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충칭의 토교에 집단 수용되었다. 토교대는 상설 조직체가 아니라 한인 청년들의 집결에 따라 그때그때 임시로 편성되었다. 토교대는 총사령부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토교대는 세 차례에 걸쳐 조직되었으며, 1945년 3월 일본군에 근무하다가 중국군 포로가 된 한적 포로들로 구성되었다. 이때 토교대 대장은 한성도가 맡았으며, 백성갑은 부대장을 맡아 대원을 훈련하였다. 토교대는 일종의 보충대 성격이었다.
1945년 5월 1일 한국광복군은 중국군사위원회의 통할 지휘에서 벗어나 임시정부의 국군으로 독자성과 자주권을 완전히 회복하였으며, 총사령부의 편제 개편이 단행되었다. 총사령부의 편제 개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각 부서에 한국인 장교들이 임명되어 총사령부가 한국광복군 주도로 운영되었다는 점이다. 이때 백성갑은 총사령부 부관처 서무과원으로 선우진(鮮于鎭)과 함께 활동하였다. 계급은 지금의 대위에 해당하는 정위(正尉)였으며, 상관인 과장은 심광식(沈光植)이었다.
8‧15광복 이후 대한임시정부 주석 김구가 1945년 11월 5일 충칭을 출발하여 상하이에 체류하였으며, 수행원 15명이 미군 수송기로 11월 23일 오후 4시 40분 김포비행장에 도착하였다. 이때 수행원으로 장준하(張俊河)‧윤경빈(尹慶彬)‧ 이영길(李永吉) 등과 함께 귀국하였다. 이들의 귀국 소식은 김구를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들 소식만큼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일본군 학병으로 끌려가 탈출한 후 한국광복군에 투신하여 활동하고 귀국한 점 때문이다. 2006년 1월 13일 세상을 떠났으며,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되었다.
1980년 건국포장,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