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수(閔泳秀)는 1921년 중국 상하이에서 부친 민필호(閔弼鎬)와 모친 신명호(申明浩)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임시정부 산하 학교인 인성학교(仁成學校)에서 수학하였다. 부친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던 때부터 독립운동 활동을 하였다.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인들과 중국의 저명인사들이 모인 가운데 한국광복군 창립식이 거행되었다. 상하이에서 탄생한 임시정부가 20여 년 만에 정식 군대를 갖추었으므로, 한국광복군의 탄생은 임시정부 요인뿐만 아니라 관내 지역 한인 사회에도 각별한 의미가 있었다. 특히, 중국과의 연합을 통해 임시정부의 위상과 직결된 군사 활동을 공식적으로 전개할 수 있다는 점은 고난의 이동 시기를 거친 임시정부가 염원한 결과였다.
민영수는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근무하다가 1942년 5월 광복군 제1, 2, 5지대를 합하여 새롭게 제2지대를 조직하였으며, 총무 조장 김용의(金容儀)의 조원으로 김성호(金成浩)와 함께 활동하였다.
1945년 5월부터 한국광복군 제2지대, 제3지대의 한미 합작 특수훈련이 시작되었다. 제2지대장 이범석(李範奭) 책임하에 미국인 장교 사전트(Clyde. B. Sargent) 대위와 정훈수가 훈련을 담당하여 이른바 OSS 훈련을 시작하였다. 이 훈련은 광복군의 정예 대원 특수작전에 필요한 정보 파괴, 무전 공작에 관한 3개월간의 교육 훈련이었다. 이때 민영수는 이재현(李在賢) · 최봉상(崔鳳祥)‧유덕량(劉德亮) 등과 함께 무전반에 배속되어 임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태평양전쟁이 연합군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중국군의 일부가 아닌 독립적인 군의 위상을 자리매김하고자 하였다. 미국과의 연합훈련을 통해 미국 공군으로부터 비행기를 차용하고, 중국 공군에 복무 중인 한인 장교를 광복군으로 전환하여 비행대를 편성함으로써 광복군 총사령부와 국내 지하 군과의 연락 임무를 수행하게 하였다.
또한, 태평양지역에서 일본군을 격파하고 북상하고 있는 미군과의 연합에 비중을 두었다. 태평양 지역에 한국광복군 태평양 지역 파견 사령부를 설치하여 대일전쟁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총사령부는 특수훈련이 끝나 가는 8월 초 국내 진입 작전을 위한 부대 편성에 착수하였고, 8월 말에 작전을 개시하기로 하였으나, 일본의 항복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이때 민영수는 총지휘관인 이범석의 수하에서 이재현 · 김석동(金奭東) · 이윤장(李允章) 등과 함께 본부 요원이 되어 OSS 훈련에 참여하였다.
1945년 2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 구성 및 업무 분장 시 선전부 총무과원에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2011년 사망하였다.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 1977년 건국포장이 수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