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진(朴永晋)은 1921년 3월 경상북도 고령(高靈) 덕곡면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갔으며, 1939년 11월 나월환(羅月煥)이 애국 청년들을 훈련하기 위해 시안〔西安〕에 개설한 한국청년특별훈련반에 입교하여 3개월간 군사교육을 받은 뒤 졸업하여 중국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한국청년전지공작대(韓國靑年戰地工作隊) 대원 김동수(金東洙)‧이해평(李海平)‧ 김천성(金天成)‧ 김용주(金容珠)‧이월봉(李月峰)‧이삼녀(李三女) 등과 함께 중국 제34 집단군 타이항산〔太行山〕 유격대 정훈부에 배속되어 타이항산 적후 공작에 투입되었다. 이들의 활동 목표는 일본군 점령 지역에 잠입하여 그곳에 거주하는 한인 청년들을 초모(招募)하는 것이었다.
타이항산 입구에서 박영진은 김동수 등과 함께 초모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사진관을 운영하는 문응국(文應國)을 비롯하여 60여 명에 달하는 인원을 초모하였다. 초모된 인원은 대부분 본부가 있는 시안으로 후송되었다. 1940년 말에 이르면 1백여 명에 가까운 대원을 확보한 무장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전지공작대가 적의 후방에서 초모 활동을 통해 세력을 확대하고 있을 때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하고 총사령부가 시안으로 이동하였고, 전지공작대도 한국광복군에 편입되었다. 이때 박영진은 1942년 5월 광복군 제1, 2, 5지대를 통합하여 개편한 제2지대의 제2구대 제3분대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하였다.
중일전쟁이 가속화되고 일본의 전선이 확대되면서 한국광복군 공작대가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파견된 것은 인도에 주둔 중인 영국군과 조선민족혁명당의 관계에서 비롯되었다. 1942년 겨울, 인도 주둔 영국군 총사령부에서는 조선민족혁명당 측에 공작원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김원봉(金元鳳)은 최성오(崔省吾)와 주세민(周世敏)을 파견하였다.
이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와 충칭〔重慶〕의 영국대사관 부관 측과의 여러 차례에 걸친 군사 합작 교섭이 주효하여 1943년 6월 광복군의 이청천(李靑天: 지청천) 총사령관과 주인도(駐印度) 영국군 동남아 전구(戰區) 총사령부 대표 매켄지(Mackenzie) 정보참모 사이에 한 · 영 상호협정이 정식 체결됨에 따라 광복군은 연합군의 일원으로 인면전구(印緬戰區: 인도와 미얀마 전구)에 출정하게 되었다.
이에 영국과의 상호 군사협정에 따라 주인도 영국군 동남아 전구 총사령부에 파견할 인원을 선발하였는데, 박영진은 공작대원으로 파견되어 활동하였다. 인면공작대는 대장 한지성, 부대장 문응국, 대원으로는 최봉진‧ 김상준‧나동규‧송철‧김성호‧이영수 등과 박영진이었다. 박영진은 중국군사위원회에서 교육을 받은 후 인도로 파견되었다.
1943년 12월 전방 지구인 인도 임팔(Imphal)에 주둔 중인 영국군 제15군단 사령부에 도착한 광복군 인면공작대는 세 곳으로 분산 배치되었는데, 박영진은 제201부대 본부와 함께 활동하였다.
그 후 임팔 작전에서 승리한 공작대는 이곳에서 철수하여 1945년 연합군이 미얀마 지구의 일본군에 총반격을 개시하자 공작대도 3개 반으로 나뉘어 각 부대에 배치되었다. 박영진은 한지성‧김성호와 함께 미얀마 중북부에서 만달레이를 향해 남진하는 부대에 배속되었다. 미얀마 수도 양곤을 목표로 진격하는 상륙작전에 참전하였으며, 1945년 5월 초 양곤을 탈환하는 데 공헌하였다. 그해 7월 초까지 연합군의 승리에 공헌하였으며, 9월 10일 대장 한지성 및 동료들과 함께 충칭의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로 복귀하였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