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도(韓聖島)는 1909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출생하였다.
1934년부터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中央陸軍軍官學校) 낙양분교(洛陽分校)의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에서 훈련을 받았다. 김구(金九)는 특무공작에 대한 지원을 요구하였지만, 장제스〔蔣介石〕는 무관 양성을 제의하면서 한중 공동 항일 군사훈련의 시작을 알렸다. 낙양분교는 중국 국민정부에서 재정적 지원과 장소를 제공한 것이었고, 학교 운영과 학생 모집 등은 김구가 주도하는 등 독자적으로 운영하였다.
낙양군관학교의 운영과 교육훈련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학생들에게는 휴가나 외출이 통제된 채 교육훈련이 실시되었다. 지청천(池靑天, 일명 이청천)이 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범석이 특별훈련반 학생대장이었다. 한성도는 노태준 · 안춘생 등과 함께 훈련받았다. 한성도는 한인특별반을 마치고 임시정부 대열에 합류하여 1936년경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상임위원을 지냈다. 1940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총사령부 참모부 제3과원으로 이진영(李進榮) · 조성철(趙誠轍) 등과 활동하였다.
임시정부가 충칭〔重慶〕으로 이전한 후 충칭에도 일본군에서 탈출한 학병과 한국광복군훈련반(한광반) 출신들과 중국군에 포로가 된 한적(韓籍) 병사 등 한인 청년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충칭의 투차오〔土橋, 토교〕에 설치한 토교대(土橋隊) 배속되었다. 토교대는 상설 조직체가 아니라 한인 청년들의 집결에 따라 그때그때 임시로 편성되었다.
토교대는 광복군 총사령부에서 관할하고 있었다. 토교대의 임무는 광복군 총사령부 경비 및 고위 요원의 호위, 광복군 기간 간부 및 건국 후의 국군 사관 요원의 양성, 일본군 가운데 한적 사병에 대한 탈출 공작, 총사령부 지시에 의한 공작 수행 등이었다.
토교대는 세 차례에 걸쳐 조직되었으며, 1945년 3월 일본군에 근무하다가 중국군 포로가 된 한적 포로들로 구성되었다. 한성도는 이때 토교대 대장을 맡았으며, 백정갑(白正甲)은 부대장을 맡아 대원을 훈련시켰다. 토교대는 일종의 보충대 성격이었다.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경호를 위한 보충부대장, 경호대장 등으로 활동하였다.
2005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