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중학교 ()

학교교육
단체
1921년,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촌에 설립된 민족계 사립 중등교육기관.
단체/학교
개교 시기
1921년 7월 11일
설립자
강훈
설립지
중국 길림성 용정촌 제4구
내용 요약

대성중학교는 1921년,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촌에 설립된 민족계 사립 중등교육기관이다. 1921년 7월 21일 유교 및 청림교 신도와 지방 부호를 비롯해 조선 각지의 민중들에게서 희사받은 교사건축 기금으로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대성유교 공교회의 주도로 학교가 운영되었으나, 진보적인 학생들로 구성된 학우회를 중심으로 진보적 사상으로 교육내용이 변화되었다. 이후 진보적인 학생들을 중심으로 반일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선봉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정의
1921년,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촌에 설립된 민족계 사립 중등교육기관.
설립 배경

1921년 7월 21일 대성유교 석화준(石华俊)과 청림교 임창세(任昌世)의 발기로 유교 및 청림교 신도와 지방 부호인 남군필(南君弼)을 비롯해 동북 여러 지방과 소련 연해주 그리고 조선 각지의 4,000여 명 민중들에게서 희사받은 교사건축 기금을 바탕으로 간도 용정촌에 설립되었다.

대성중학교 개학식은 1921년 7월 11일 대성유교 공교회의 일원인 강훈(姜勛) 등 민족운동계 인사들이 연길도윤 도빈(陶彬)의 지지 아래 용정촌에 건축된 벽돌 목조건물의 교사(校舍)에서 거행되었다.

대성중학교는 설립 당시 대성유교 공교회의 주도로 학교가 운영되었으나, 1922년부터 진보적 청년이 맑스주의 이론에 접하면서 반일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해 갔다. 대성중학은 동흥중학, 은진중학과 함께 당시 연변 지역을 비롯한 만주 지역의 대표적인 중등교육기관으로, 조선인 민족운동과도 긴밀히 밀착되어 있었다.

교훈과 교육 목표

학교 창립 당시 공교회에서 학교를 운영하였으므로 공맹지도를 교수함을 교육의 취지로 삼았으며, 『사서오경』과 『 명심보감』 등을 습득시켜 공자의 봉건 윤리도덕을 역설하는 것을 교학의 기본내용으로 규정하였다. 학교 교사(校舍) 오른쪽에는 공자 위패를 걸어 놓고 매달 초하루 아침마다 전교 사생들의 모여 ‘존공의식(尊孔儀式)’을 거행하였는데 향불을 피우고 공자제(孔子祭)를 지냈다.

1922년부터 진보적인 학생들은 맑스주의 이론을 바탕으로 민족해방투쟁을 전개해 갔고, ‘광명회’라는 맑스주의 연구소를 조직하여 과학적 사회주의의 새 이론과 민족해방투쟁의 새로운 혁명사상을 접할 수 있었다. 학우회의 지휘 아래 학생들은 공교회 인사이며 보수적인 교무주임을 몰아내고 수학교원 현기형 선생을 교무주임으로 추대하였다.

학우회에서는 교원들과 협상하여 학교운영 방안과 교육과정을 작성하였는 바, 사회과 교수를 위주로 자연과와 외국어인 영어와 일어 · 한어를 교수하고 예능과로서 습자, 수공, 도화, 음악, 체조 등의 과목을 증설하는 동시에 각종 종교의식을 무조건 폐지한다고 선포하였다. 즉, 학교교육을 종교와 철저히 분리시키는 방침을 전개하였다.

이후 대성중학교에서는 사회주의 단체가 조직되어 마르크스혁명이론 등에 관한 학습이 이루어졌고, 교원강습회 등을 통해 진보적 사상이 전파되어 갔다. 여기에 속한 학생들은 반제, 반일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선봉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변천 및 현황

대성중학교는 설립 당시 대성유교 공교회의 주도로 학교가 운영되어, 공맹지도를 교육의 취지로 삼았다. 이러한 교육의 취지, 교학의 내용은 당시의 현실을 뼈저리게 느껴 지식을 배워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는 진보적인 청년학생들의 숙원 및 요구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1922년부터 진보적인 학생들로 구성된 학우회는 공교회 인사 및 보수적인 교사들은 몰아내고 진보적 사상을 가진 교원을 교무주임으로 추대하였다. 그 결과 학교운영은 공교회의 틀에서 벗어났고, 종교와 분리된 학교교육 운영이라는 방침을 표방해 갔다.

이후 대성중학교 학생들은 반일운동에 앞장섰다. 대성중학교에는 ‘대성중학교청년총연맹’, ‘대성중학교소년총회’ 등이 결성되었고, 이에 대해 일본 총영사관은 ‘제1차 및 제2차 간도공산당검거사건’을 통해 학생들을 검거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학생들은 성토대회나 시위행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다.

1931년 9 · 18사변[만주사변] 이후 사립학교에 대한 통제는 더욱 심해졌고, 시세의 변화에 따라 1935년에는 용정에 있던 대성중학교, 동흥중학교, 농업중학교가 합병되어 ‘민성중학교’가 되었다. 1년 후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는 다시 분립되었으나, 학교는 일본인의 손으로 넘어갔고 일본인 교원이 파견되기도 하였다.

1937년 용정의 모든 사립학교를 만주국 교육부에 귀속시킨다는 발표가 있었고, 1938년 8월 26일에는 사립학교 비준규칙이 정해졌다. 이 규칙에 따라 사립의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는 용정국민고등학교[농과]로 통합되었고, 완전히 일본의 통제를 받게 되었다.

1945년 이후 대성중학교 졸업생들을 중심으로 복교활동이 이루어졌으나, 1946년 대성중학교는 용정 5개의 중학교와 합해져 길림성립용정중학교가 되었다. 이로써 대성중학교는 중국공산당의 지휘 아래 놓이게 되었다.

교육 활동

학교 창립 당시 학교운영이사회 이사 겸 교주로 강훈이 추대되었고, 교무주임으로 공교회 유지인사 임봉규가, 교원으로 현기형 · 한장순 · 김소연 · 이정열 등 5명이 초빙되었으며, 조선인 청년 50명을 학생으로 모집하였다.

1921년 동맹휴교, 공교회 인사 및 교원 방출, 진보적 학생들의 학우회가 학교를 관리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수업연한이 2년으로 줄어들었고, 1923년 3월 제1회 졸업생은 47명, 1924년 3월 제2회 졸업생은 18명이었다. 이후 대성중학교가 창립된 지 18년째 되는 1939년에는 제14회 졸업식과 더불어 476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참고문헌

단행본

박금해, 『중국 조선족 교육의 역사와 현실』(경인문화사, 2012)
박주신, 『간도한인의 민족교육운동사』(아세아문화사, 2000)

논문

한생철, 「혁명의 열의로 들끓던 배움터: 대성중학교」(『연변문사자료』 6, 정협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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