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봉우(桂奉瑀, 1880~1959)는 구한말 계몽운동을 시작으로 1910년 이후 중국과 러시아를 주무대로 활동했던 독립운동가이며, 민족교육자 · 역사학자 · 국문학자 · 언론인이다.
『최신동국사』는 연길현 광성학교 교원이었던 계봉우가 1912년에 출간한 『 조선역사』를 원본으로 삼아 1917년 보문사에서 출간한 역사서로, 당시 간도의 민족계 교육기관에서 사용되었다.
계봉우는 1880년 함경도 영흥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남들보다 뛰어난 학업 능력을 보였으나, 아버지가 사망한 뒤에는 가세가 기울어 학업의 중단을 반복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의 소식은 그에게 민족의 현실을 깨닫는 계기가 되었다.
1906년 10월 영흥에 설립된 홍명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계몽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하였다. 1907년에는 국채보상운동과 각종 사회단체 및 학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기독교회에서 설립한 영생중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이때 평생의 정신적 지주이자 독립운동의 동지인 성재 이동휘(李東輝)를 만났다.
1911년 1월 계봉우는 북간도로 망명하여 선교활동과 교육활동을 전개하였다. 망명 후 소영자(小營子)에 설립된 길동기독학당(吉東基督學堂)에서 조선역사와 조선지리를 가르쳤으며, 학생들에게 교수할 교수안(敎授案)으로 『신한독립사(新韓獨立史)』의 저술을 시작으로, 1912년 간민교육회에서 구성한 교과서 편찬위원으로 임명되어 창동학교의 남공선과 함께 북간도 한인들의 사립학교 교재 편찬에 가담하였다.
이때 『조선역사』와 수신교과서 『오수불망(吾讐不忘)』을 편찬하여 북간도의 학교 교재로 보급하였다. 계봉우의 또 다른 저서 『만고의사 안즁근젼』은 단선(檀仙)이라는 필명으로 『권업신문』에 1914년 6월 28일부터 같은 해 8월 29일까지 10회에 걸쳐 연재된 한글본 안중근 의사의 전기이다.
1920년 상하이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한 후 기독교로부터 멀어졌고, 1923년부터 1937년까지 연해주 지역의 조선인 학교에서 조선어와 조선역사를 가르쳤다. 1937년 강제로 이주당한 이후, 한인들의 고려어(高麗語) 교육의 확대와 개선을 요구하는 글을 『레닌의긔치』에 발표하였고,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고려사범학교 교수와 고려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다 퇴직하였다. 이 시기에는 사회주의 교육이 강요되었지만, 계봉우는 민족교육을 확대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교육에 대한 집념은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의 정체성을 지탱하는 역할을 하였다.
『최신동국사』는 중등교육과정의 교재로서 과별(課別)로 편성되었던 1912년판 『조선역사』를 원본으로 삼은 것이다. 1917년에 간행되었고, 3 · 1운동 후인 1920년대까지 덕흥학교, 창동학교, 광성학교, 명신여학교, 영신학교, 동명학교, 신풍학교 등 북간도 민족계 사립학교에서 필수 교재로 사용되었다.
전 3책으로 된 『최신동국사』는 주로 한국 역사상의 대외투쟁, 특히 일제의 조선침략과 조선민족의 반일투쟁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었다. 그 일부 내용을 소개하면 13과 ‘조선이태왕의 밀사’는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내용이고, 14과 ‘의병의 인과’는 1895년 이후 의병의 봉기를 기술한 내용이다. 이어 15과 ‘사회와 학교’에서는 독립협회, 대한협회 등 사회단체의 식산활동과 관립, 사립 교육기관의 설립을 설명하였고 일진회를 비판하였다.
16과 ‘의사의 종기’에서는 장인환, 이재명의 매국노 공격,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처단, ‘합병의 치욕’에서는 합병조약의 강제와 조선총독부 설치에 관한 내용을 다루었다. 17과 마지막 부분에서는 국치를 씻어낼 것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학생들이 배일사상 및 민족독립정신을 함양할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바로 이 같은 민족적 색채로 인하여 『최신동국사』는 1913년 일제에 의해 금서 처분을 받게 되었고, 이 책을 사용해 가르친 영신학교와 덕흥학교의 교사들도 일제에 구속되는 등의 수난을 겪었다.
『최신동국사』의 존재는 1920년 일제 경찰이 항일단체와 관련되었다는 혐의로 간도 용정의 영신학교 학생들을 체포하고 그들이 소지한 책을 압수하는 과정에서 드러났다. 간도의 민족교육가이며 연길현 소영자 광성학교의 교원이었던 계봉우가 저술한 역사서인 이 책은 명동학교, 창동학교, 광성학교, 영신학교, 덕흥학교 등 간도 민족계 사립학교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하얼빈 보문사 발행의 전 3책으로 1913년 일제에 의해 금서가 되었다. 주로 한국 역사상의 대외투쟁, 특히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침략과 한국민족의 반일투쟁에 관한 내용이 잘 표현되어 있다. 『최신동국사』는 북간도 민족교육가에 의해 집필된 역사 교과서란 점에서 그 의의가 크며, 독립의식이 반영된 역사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