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던 사람은 이동휘의 딸 이의순을 비롯한 정신태, 우봉운 등으로 이들은 한인, 만주인,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삼국전도회’에서 활동한 핵심인물이었다. 더불어 이들은 북간도 각지의 기독청년회와 함께 강연회, 토론회, 성경학교, 사경회, 부흥회 등의 형식으로 개화운동과 민중운동을 적극 추진해 갔다.
1911년 당시 명동학교 여학부에는 보통과 53명, 고등과 12명, 합하여 65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1913년 당시에도 명동여학교 학생은 60명에 달하였으며, 대부분이 각 지역에서 온 유학생이었고 부형과 학생들이 열심으로 노력한 결과 1914년에는 졸업생이 나올 것을 전망되었다.
당시 간도 총영사대리 사카이 요사키치[堺與三吉]가 일본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 앞으로 보낸, 1913~1920년까지 보고에 지속적으로 ‘명동여학교’가 ‘불령선인 단체’로 포함되어 있어, 명동여학교가 민족교육, 반일 투쟁교육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