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여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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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정보
학교교육
단체
1911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학교에 병설되었던 민족계 여성교육기관.
이칭
이칭
명동학교 여학부
단체/학교
개교 시기
1911년 2월
설립지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
소재지
중국 길림성 화룡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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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명동여학교는 1911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학교에 병설되었던 민족계 여성교육기관이다. 1911년 이동휘가 길림성 화룡현 명동에 와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이전에 설립되었던 명동학교에 여학교를 병설하며 설립되었다. 1911년 2월 설립된 여성교육기관으로 개화운동, 민중운동, 민족교육운동을 실행하였다.

정의
1911년,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학교에 병설되었던 민족계 여성교육기관.
설립 배경

1908년 4월 명동촌(明東村)에 있던 사숙이 통합되어 명동서숙(明東書塾)이 설립되었다. 숙장(塾長)으로 박무림(朴茂林), 숙감(塾監)으로 김약연이 취임하였고, 재정은 문치정(文治政)이 담당하였다. 교사로 김학연, 남위언(南葦彦) 등이 초빙되었다. 1909년에 명동서숙은 이름을 명동학교로 바꾸고 김약연이 교장에 취임하였다.

1911년 이동휘(李東輝)가 명동에 와서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자, 명동학교에 여학교가 병설되어 명동여학교가 설립되었다. 교사로는 정신태(鄭信泰), 이의순(李義橓), 우봉운(禹鳳雲) 등이 취임하였다.

교육 활동

명동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했던 사람은 이동휘의 딸 이의순을 비롯한 정신태, 우봉운 등으로 이들은 한인, 만주인, 러시아인으로 구성된 ‘삼국전도회’에서 활동한 핵심인물이었다. 더불어 이들은 북간도 각지의 기독청년회와 함께 강연회, 토론회, 성경학교, 사경회, 부흥회 등의 형식으로 개화운동과 민중운동을 적극 추진해 갔다.

1911년 당시 명동학교 여학부에는 보통과 53명, 고등과 12명, 합하여 65명이 재학하고 있었다. 1913년 당시에도 명동여학교 학생은 60명에 달하였으며, 대부분이 각 지역에서 온 유학생이었고 부형과 학생들이 열심으로 노력한 결과 1914년에는 졸업생이 나올 것을 전망되었다.

당시 간도 총영사대리 사카이 요사키치[堺與三吉]가 일본 외무대신 우치다 고사이[內田康哉] 앞으로 보낸, 1913~1920년까지 보고에 지속적으로 ‘명동여학교’가 ‘불령선인 단체’로 포함되어 있어, 명동여학교가 민족교육, 반일 투쟁교육을 전개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참고문헌

단행본

박금해, 『중국 조선족 교육의 역사와 현실』(경인문화사, 2012)
윤병석 외, 『명동학교 100주년 기념 북간도지역 한인 민족운동』(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8)
박주신, 『간도한인의 민족교육운동사』(아세아문화사, 2000)

논문

리홍준, 「반일민족교육의 선봉: 명동학교」(『연변문사자료』 5, 정협연변조선족자치주위원회, 1988)

신문 · 잡지

『신한민보』(1913. 10. 3.)

인터넷 자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不逞團關係雜件」 일본 외무성기록(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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