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흥중학교는 1921년, 중국 길림성 간도 용정에 설립된 민족계 사립 중등교육기관이다. 1921년 10월 1일 천도교 신자 최익룡이 용정에 설립했던 동흥소학에 병설된 중학강습반을 승격해 만들어졌다. 학생들은 연변 각 지역에서 온 천도교인 자제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일부는 소련 연해주와 조선, 남만주 및 북만주에서 오기도 하였다.
1913년에 함경남도 영흥군의 천도교 신도인 백사원, 고상률 등은 용정에 와서 교회당을 세우고 전도사업을 벌였는데, 그 세력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다. 1919년 3월 손병희가 조선민족대표자 33명이 서명한 ‘독립선언’을 발표된 뒤, 용정 일대에서 천도교 세력이 점차 확장되었고 각지에서는 교회를 설립하고 학교를 보급하는 등의 활동이 전개되었다.
1921년 4월 15일 연변 지역에서 반일운동에 종사하던 천도교 신자 최익룡 등은 각지에 산재하는 천도교 조직의 지원 아래, 천도교종리원(天道敎宗理院)의 명의로 용정에 동흥소학을 설립하고 동흥소학 내에 중학강습반을 병설하였다. 같은 해 10월 1일 중학강습반을 동흥중학으로 승격하였는데, 동흥소학은 동흥중학의 부속소학으로 전환되었다.
최익룡의 중학교 창립은 각지 천도교회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최익룡은 당시 용정의 유지인사들이었던 김홍성, 이주화, 한장수와 함께 힘쓴 결과 각 지역의 천도교인들과 협력해 학교를 설립하기 위한 의연금 모집을 전개해 갔다.
1922년 천도교회는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조선에서 의연금을 모집도 추진하였고, 1923년 4월에는 새 교사건축을 시작하여 같은 해 9월 29일에 준공하였다. 학교 건물은 검은 벽돌집으로 세 개의 교실로 이루어졌다.
동흥중학교의 학생들은 연변 각 지역에서 온 천도교인 자제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고, 일부는 소련 연해주와 조선, 남만주 및 북만주에서 오기도 하였다.
수업 내용은 시기에 따라 내용을 달리하였는데, 창설 당시에는 조선어, 대수, 산수, 물리, 화학, 영어, 샹리, 지리, 역사, 한문, 도화, 작문 등과 천도교에 대한 강의가 이루어졌다. 제2대 한장순 교장 당시에는 일어가 정식 과목으로 설치되었다. 제3대 윤익선 교장 당시에는 조선어, 조선역사, 조선지리, 동양역사, 심리학, 물리, 영어, 기하, 대수, 화학, 일어, 작문, 영어문법, 서양역사, 용기화, 논리, 식물, 한문, 산수, 일어문법 등의 과목이 학년별로 적절히 배치되었다.
제5대 임계학 교장 당시에는 일본 문부성이 결정한 조선총독부 편찬의 교과서를 채용하였으나, 교수용어는 조선어가 그대로 사용되었고 조선어문, 조선역사, 조선지리 등은 계속 교수되었다. 제7대 이후 일본인 교장이 부임하면서 군사훈련, 강제동원, 타매교육이 강화되었다.
창립 초기에 교원 3명, 학생 4개반 113명이었던 것이, 제2대 교장 시절에는 교원 9명, 학생 9개반 402명[4개반의 소학생 포함]으로 늘어났으나, 제3대 교장 이후부터는 소폭이기는 하지만 교원수 혹은 학생수가 감소되는 경향을 보였다. 제5대 교장 시절에는 교원 6명, 학생 202명이 되었다.
동흥중학교 교가는 다음과 같다.
[1절] 모아뫼 앞에 바위같은 / 저 높고 넓은 우리들의 집이다.
[2절] 무궁화 붉고 흰뫼 높아 / 둥글어한 우리들의 얼이다.
[후렴] 배꽃 동흥모는 / 가슴에 얼없고야 그 무어랴 / 깊은 뜻 거룩한 얼 다하야 / 힘서 배우는 우리 학우 / 흰뫼 낮으며 하늘 엎도록 / 가라 가라 우리들 가라. / 흰뫼 낮으며 하늘 엎도록 / 동흥학교 오라 오라 오라 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