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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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설립된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종로지방 소속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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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종교교회는 1900년 설립된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종로지방 소속 교회이다. 미국 남감리회의 여선교사 캠벨 부인이 1900년 부활주일을 기해 집회를 시작하며 잣골교회라고 하였다. 여성 중심의 학교 교회인 잣골교회가 1908년 4월 도렴동에 벽돌예배당을 건축하고 ‘종교교회’라고 이름하였다. 잣골교회를 지켰던 교인들은 후에 창성동 자수교 아래 자리 잡으면서 ‘자교교회’라 하였다. 종교교회에는 윤치호 등의 교육 운동가들이 출석하고 배화학당 교사들이 출석하면서 청년 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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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00년 설립된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종로지방 소속 교회.
연원 및 변천

미국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는 1896년 리드(C. F. Reid) 선교사의 내한으로 시작되었고, 이는 개화파 윤치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윤치호는 남감리회에서 운영하는 중국의 중서서원(中西書院)에서 수학하면서 1887년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남감리교인이 되었다.

미국 유학을 마치고 중국의 중서서원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다가 귀국한 윤치호는 미국 유학시절부터 바라던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를 거듭 요청하였고, 그 결과 남감리회의 한국 선교가 시작될 수 있었다. 남감리회의 첫 파송을 받고 한국 선교를 개척한 리드 선교사는 1897년 고양과 서울 광희문에 남감리교회를 설립하였다.

미국 남감리회가 파송한 첫 여선교사는 캠벨(J. P. Campbell) 부인이었다. 그는 1897년 10월 내한하여 경복궁 옆 잣골에 독자적인 여선교부지를 마련하고, 1898년 8월 배화학당을 시작하였다.

캠벨 부인은 1900년 4월 15일 부활주일을 기해 집회를 시작했는데, 당시 배화학당 학생과 교사 외 외부 사람들도 다수 참석하였다. ‘잣골교회’라는 이름으로 교실이나 선교사 사택에서 예배드리다가, 1901년 가을 벽돌 예배당(루이즈 워커 예배당, Louise Walker Chapel)을 건축하였다.

여성 중심의 학교 교회인 잣골교회에 교인이 계속 증가하자 1908년 4월 종침교(琮琛橋) 부근 도렴동에 새 예배당을 마련하고 교회를 옮겨가면서 이때부터 ‘종교교회’로 부르기 시작했다.

한편 잣골에서 도렴동으로 교회를 옮길 때 따라 나가지 않고 그대로 잣골교회를 지켰던 교인들은 이후 창성동 자수교(慈壽橋) 아래 자리 잡으면서 ‘자교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종교교회는 1910년에는 도렴동에 십자형 고딕 벽돌예배당을 건축하고, 남감리회 선교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종교교회에는 윤치호나 유경상 등의 교육운동가들이 출석하고 일제강점기에 남궁억, 차미리사, 김응집 등 민족의식이 강한 배화학당 교사들이 출석하면서 청년학생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으며, 3·1운동에는 전임 정춘수 목사와 당시 담임 오화영 목사가 민족대표로 참여하여 옥고를 치렀다. 덕성여대의 모체인 근화학원 설립자인 차미리사, 김응집, 배화학교 학생들이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었다.

1920년대 미국에서 유학했던 양주삼 목사가 담임하면서 교회가 성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남감리회의 대표 교회로 성장하면서 1930년 남북감리교회가 합동하여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창립할 때 양주삼 목사는 초대 총리사(감독)에 선출되었다.

1920∼30년대 종교교회는 교육활동, 절제운동, 계몽운동 등을 주도하는 민족운동의 중심체 역할을 담당하였다. 일제 말기 교회의 역경, 해방 이후 교단 분열과 한국전쟁의 아픔을 딛고, 1959년 석조 2층의 ‘양주삼 총리사 기념예배당’을 봉헌했다.

1960∼70년대 급변하는 사회 환경에서도 종교교회는 교세의 성장을 이루며 국내 개척교회 사업, 장학사업, 소외계층 청소년 · 청년들을 위한 사업 등에 힘썼으며, 개교회로서는 처음으로 해외선교를 추진하였다. 1976년 부임한 나원용 목사는 1990년 서울연회 감독이 되었고, 2002년 도렴동 같은 위치에 빌딩형 성전을 지어 봉헌했다.

참고문헌

『종교교회사』(이덕주, 도서출판 종교교회, 2005)
『배화백년사(1898∼1998)』(성백걸, 배화학원,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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