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북오도연합노회 ()

개신교
단체
1945년 12월 1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북한지역의 평안남 · 북도와 함경남 · 북도, 그리고 황해도의 16개 노회가 연합하여 조직한 재건 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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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945년 12월 1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북한지역의 평안남 · 북도와 함경남 · 북도, 그리고 황해도의 16개 노회가 연합하여 조직한 재건 노회.
설립목적

이북오도연합노회는 해방 이후 북한에 진주한 소련군과 공산 당국의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점차 심각해지고, 38선에 대한 감시와 통제가 강화되면서 남북의 교회가 두절되는 상황이 전개되자 북한 지역의 교회들이라도 긴밀하게 결속할 수 있는 조직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설립되었다. 이북오도연합노회에서 결의한 중요 안건은 다음과 같다. ① 북한 오도연합노회를 남북통일의 완성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할 수 있는 잠정적 협의기관으로 한다. ② 총회의 헌법은 개정 이전의 헌법을 사용하되 남북통일 총회가 열릴 때까지 그대로 둔다. ③ 전 교회는 신사참배의 죄과를 통회하고 교직자는 2개월간 근신할 것으로 한다. ④ 신학교는 연합노회 직영으로 한다. ⑤ 조국의 기독교화를 목표로 독립기념전도회를 조직하여 전도 교회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한다. ⑥ 북한교회를 대표할 사절단을 파견하여 연합국 사령관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기로 한다.

연원 및 변천

이북오도연합노회는 남북통일이 완성될 때까지 총회를 대행할 수 있는 잠정적 협의기관으로 조직되었다. 연합노회의 회장에는 김진수 목사가 선임되었고 김철훈, 이유택, 김길수 목사 등이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북한 공산당국은 이북오도연합노회가 1946년 11월 3일 주일 총선거를 전면 반대하고 나서자 조선기독교도연맹을 조직하고 연합노회 간부들을 검거하였다. 이후 연합노회는 사라지고 조선기독교도연맹이 대신하게 되었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이 공식적으로 결성된 이후 북한의 교회들은 점차 친사회주의적인 교회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일제 강점기 부흥사로 활약했던 김익두 목사가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초대 총회장이 되었으며, 1950년 3월에는 장로회의 평양신학교와 감리회의 성화신학교를 통합하여 평양기독교신학교로 개칭하여 신학교육을 장악하였다. 따라서 이북오도연합노회의 영향력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의의와 평가

이북오도연합노회는 일제에 의해 강제 개정된 헌법이 아닌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의 기존 헌법으로 돌아가 통일 총회 시까지로 그 개정을 유보하였다는 점에서 한국 장로회의 정통성을 이어갔다는데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한국기독교의 역사』Ⅲ(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9)
『북한교회사』(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북한교회사집필위원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6)
『한국기독교해방10년사』(김양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발행, 1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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