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기준 ()

개신교
인물
해방 이후 북한의 조선기독교도연맹 서기장을 역임한 목사.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921년
사망 연도
1994년
출생지
평안남도 증산
정의
해방 이후 북한의 조선기독교도연맹 서기장을 역임한 목사.
생애

1921년 9월 평안남도 증산군 이압리에서 출생하였으며, 1958년 조선민주당 조직부장을 역임하였다. 1965년 인민경제대학을 졸업하고, 1978년 평양신학원을 졸업하였다. 1982년 2월 조선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 부임하여, 사망하기 전까지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주요 임원으로 각종 대외활동을 펼쳤다. 1994년에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 총회 참석을 위한 판문점 접촉 북측 대표였으나 그해 사망하였다.

활동사항

1982년 2월 조선기독교도연맹 중앙위원회 서기장으로 스위스를 방문한 이래 대외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하였다. 1985년에는 중국과 소련을, 1989년에는 미국을 방문하였다.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남북회담 대표로 활동하였다. 1990년 일본과 스위스를 방문하였으며, 1991년에는 호주를 방문하는 등 북한 기독교의 대표자로 활발한 해외활동을 하였다. 1992년 1월 13일에는 방북한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총무 권호경 목사를 영접하였으며, 이후 남한 기독교 대표자들과의 교류를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조선기독교도연맹과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의 원활한 관계를 형성 유지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이는 그가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단 단장 명의로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총무 권호경 목사에게 보낸 1992년 2월 14일자 편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내용은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의 요청에 따라 조선기독교도연맹 대표단이 판문점을 통과하여 서울에서 열리는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 제41차 총회에 참석하고자 준비를 모두 마쳤으나 남한 당국의 방침에 의해 갈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남북의 기독교가 조선기독교도연맹과 한국기독교 교회협의회를 주축으로 연대할 것을 피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사망으로 남북 기독교 관계에 대한 그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상훈과 추모

북한은 1981년부터 1994년 사망할 때까지 북한 기독교계를 대표하여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서기장으로서 오랫동안 종교 교류에 힘썼던 그에게 1995년 조국통일상을 추서했다.

참고문헌

『북한종교의 새로운 이해』(김흥수·류대영, 다산글방, 2002)
『비엔나에서 프랑크푸르트까지: 북과 해외동포·기독자간의 통일대화 10년의 회고』(홍동근, 형상사, 1994)
『북한교회의 목사들은 무엇을 어떻게 설교할까?』(고기준 외, 형상사, 199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www.kdemo.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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