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북한 공산정권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기독교인들이 남한에서 살아가기 위해 서로 협력할 수 있는 조직을 구성할 필요가 제기됨에 따라 설립되었다.
1946년 4월 남한으로 월남하는 기독교인들이 증가하자 이북기독교신도연합회가 조직되었고, 회장에 한경직, 부회장 선우훈, 서기 김형제 등이 선출되었다. 이북기독교신도연합회는 점차 월남 기독교인들의 수가 증가하자 1948년 4월 총회에서 규칙을 개정하여 회원 자격을 북한 출신 교역자와 북한 각 도의 장로 대표 10인으로 정하여 그 명칭을 이북기독신도대표회로 하였다. 이때 회계에 허연, 총무 이인식과 협동총무 킨슬러(F. Kinsler, 권세열)를 추가로 선발하였다. 이북기독신도대표회에는 이성국 목사를 비롯한 관북 출신 회원의 수가 적었으며, 관북교우회가 따로 조직되어 이들이 거기에 합류함에 따라 평안도 및 황해도를 중심으로 하는 서북 지역 출신들의 조직으로 변화하였다. 6·25전쟁으로 북한 기독교인들이 대거 월남하자 이북기독신도대표회의 조직 강화와 확대가 요구되었다. 1951년 9월 부산 광복교회에서 총회를 열고 임원진을 보강하였다. 이북기독교신도연합회는 피난민 자녀 교육에 주안점을 두어 대광학원을 신설하였고, 숭의여학교와 보성여학교를 재건하였으며, 숭실대학 재건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또한 전후 복구사업의 일환으로 예배당을 건립하여 북한 출신 신자들의 새로운 정착을 위한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북기독신도대표회는 해방 이후와 6·25전쟁 이후 월남한 북한 기독교인들이 남한 사회에서 정착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단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이북기독신도대표회는 교회와 학교의 복구, 학생기숙사 및 박물관, 각종 구호 사업에 들어가는 엄청난 자금을 대부분 미국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제공받음으로써 남한교회 안의 중심세력으로 급속하게 자리를 잡을 수 있었고, 이는 한국교회 안의 반공이데올로기 및 친미주의를 더욱 강화시키는 기제로 작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점은 결국 지금의 한국 교계가 양극화된 진영으로 나뉘어 여러 가지의 갈등을 일으키는 근본적인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