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1년 2월 17일 평양에서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길선주 목사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길선주 목사가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시무하였기 때문에 그 영향으로 평양 숭실중학교에 입학해 1907년에 졸업하였으며, 1911년에는 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신성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맥퀸(G. S. McCune, 윤산온)의 추천으로 선천의 신성학교에서 수학과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로 활동하였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3년간 복역하였다. 1913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옥중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병이 악화되어 귀국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1919년에 사망하였다.
1907년 4월 양기탁, 안창호, 이회영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인 신민회가 창립되자 합류하여 평양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11년 일제의 한국 민족운동 탄압사건인 105인 사건으로 5년 형을 언도받고 투옥되었다. 1912년 9월 28일 경성복심법원 공소심 이후 105인 중 6명을 제외한 99명과 함께 석방되어 다시 신성학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계속되는 일경의 감시와 통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보로 국경을 넘어 만주 안동으로 피신하였다가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였다. 유학생활을 하면서도 도미 한국 지도자들과 함께 민족운동을 하였으며, 교포들의 교육을 위해 클레몬트(Clairemont) 한국인 국어강습소에서 가르치는 한편 로스엔젤리스에도 국어강습소를 개설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독립운동 공훈을 기념하여 1977년 대통령 표창을 수여하였으며,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