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기독청년동맹은 장로교·감리교 청년들이 중심이 된 조직으로 김구·김규식 등 중도파를 지지하며 신탁통치 및 단정수립에 반대했으나 교파환원(敎派還元)과 중도적 정치세력의 약화에 따라 해산되었다.
조선기독청년동맹은 선언서에서 “신의 은총으로 복음주의에 입각하여 강력한 통일교회”와 “조국을 참된 축복의 땅으로 아름다운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매진할 것이라고 밝혔듯이 반공·반탁을 주장하며 통일된 정부 및 교회의 건설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해방 이후 남한의 기독청년들은 건국·전도·봉사 등 사업을 위해 1945년 8월 19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집회를 열고 장로교·감리교 청년 중심의 조선기독청년동맹을 결성하였다. 임원진은 회장 김교영(金敎英), 부회장 윤원호(尹元鎬), 총무 김태범(金泰範), 사회 부장 양하근(梁夏根), 건설 부장 최영준(崔永俊), 선전 부장 맹기영, 사교 부장 이종환(李鍾桓), 음악 부장 신충현 등이었고, 자문진은 김관식(金觀植)·김영주(金英珠)·김종대(金鍾大)·김재준(金在俊)·변홍규(卞鴻圭)·조신일(趙信一)·임영빈(任英淋) 목사 등이었다.
조선기독청년동맹은 같은 해 11월 조선기독청년회전국연합회(朝鮮基督靑年會全國聯合會)로 개칭하였다. 임원진은 회장 김규식(金奎植), 부회장 이강훈(李康勳)·엄요섭(嚴堯燮), 총무 김희운(金熙運), 임원 강원용(姜元龍)·노세우(盧世愚)·맹기영(孟基永)·신충현(申忠鉉)·윤판석(尹判石)·이명하(李明河)·이태현(李台現)·조향록(趙香錄) 등이었는데, 환국한 중경(重慶)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다수 참여하였다.
조선기독청년동맹은 귀환동포를 위한 모금 및 숙식 제공, 해방 기념 연합예배와 미군 환영 음악예배 개최, 미군 환영 대형아치 제작, 대한민국 임시정부 환영 집회 참가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조선기독교청년회전국연합회로의 개칭을 전후하여 민족의 완전 독립을 목표로 하여 임시정부 봉대(奉戴)와 신탁통치 반대, 3·8선 철폐 등을 주장하였다. 1946년 6월 김규식과 여운형(呂運亨)을 중심으로 진행된 좌우합작운동을 지지했으며, 기독교신민회(1945. 12)·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1945. 12)·그리스도교연맹(1947. 7)·기독교민주동맹(1947. 12) 등과는 달리 김구·김규식의 중도파를 지지하였다. 아울러 연합회는 기독청년단체로는 유일하게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지지했으며, 임원들 중심의 기독교청년연합회동지회를 별도로 운영하였다.
연합회는 1947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개최된 제2회 세계기독청년대회에 엄요섭(장로교)과 오창희(감리교) 등을, 1948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 엄요섭을 파견하는 등 세계 기독청년단체와의 연대도 모색하였다. 그러나 1948년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총회에서 교파환원(敎派還元)이 결정되면서 연합조직으로서의 성격을 잃고 해산되었다.
해방 직후 최초로 창립된 기독청년 연합단체였던 조선기독청년동맹은 귀환동포를 위한 구제활동을 진행했으며, 이와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奉戴)를 주장하고 신탁통치와 단정수립을 반대하는 등 정치조직으로서의 역할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