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 리뷰』는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rory, 1882~1899년 발행)』를 계승한 영문 잡지로서, 한국의 역사·문화·정치·풍습·법률·예술·과학·종교·언어·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글을 실어 국내외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정부에서 설립한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로 1886년 내한한 헐버트는 계약기간이 끝나자 미국으로 귀국했다가 1893년 다시 내한하여 4년간 삼문출판사의 책임자로 근무하였다. 이 시기 그가 편집을 맡았던 『코리안 리포지터리(the Korean Reposirory)』가 폐간되고 같은 해 『독립신문』 영문판인The Independent도 폐간되자 주한 서양인들 사이에 한국을 이해하며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새로운 영문 간행물이 필요하게 되었다.
1901년 1월부터 1906년 12월까지 총 72호가 발간되었으며, 편집인은 헐버트였다. 매호 분량은 40~50쪽 내외였으며, 한국의 역사·문화·정치·풍습·법률·예술·과학·종교·언어·문학 등 다양한 분야의 글 151편이 수록되었다.
선교사 헐버트는 “한국문제에 관심을 가진 외국인들 사이에 대화의 중개자” 역할을 수행하기 위한 취지에서 1901년 1월 『코리아 리뷰』를 창간하였다. 편집체제는 『코리안 리포지터리』를 계승했으나, 선교 관련 내용은 상대적으로 적게 실렸다. 저자의 대부분은 한국 거주 서양인이었고 대부분이 미국인이었다.
내용은 크게 한국에 대한 연구를 소개하는 난(Article), 잡동사니(Odds and Ends), 질문난(Question and Answer), 뉴스 캘린더(News Calender), 논설(Editorial Comment)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헐버트는 어학선생 박면식의 도움을 받아 창간호부터 「한국의 역사」(The History of Korea)를 연재하여 후일 이를 단행본으로 출간하기도 하였다.
창간 초기의 정치 관련 기사를 보면 헐버트는 한국의 발전을 위해 일본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등 일본에 대해 호의적이었으나,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 이후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를 종종 게재하였다. 이는 헐버트가 한국의 독립운동을 가장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서양인이란 점과 무관치 않을 것이다.
윔즈(C. N. Weems)의 연구(Hulbert's History of Korea)에 따르면 헐버트는 『코리아 리뷰』를 통해 한국인이 다른 민족들과 동등한 재능을 가졌고, 교육을 통해서만 독립이 가능하며, 한국의 진보와 자유를 위해서는 기독교가 필요하고, 한국에 있는 외국인들은 일본 매체에 이용되지 않고 한국을 지원하자고 주장했다고 한다.
1904년 폐간이 논의된 적이 있으나 중단없이 간행되며 한국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국내외에 제공했던 『코리아 리뷰』는, 1906년 12월호를 끝으로 예고 없이 폐간되었다. 아마도 1905년 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통감정치가 시작되면서 항일적 성향의 헐버트로서는 잡지의 발간 및 운영이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된다.
헐버트에 따르면 『코리아 리뷰』는 한국·일본·중국 및 미국·영국·독일·프랑스 등 19개국에 독자가 있었다. 한국의 역사·문화·정치·풍습·법률·예술·과학·종교·언어·문학 등에 대한 다양한 글이 실려 한국학 연구의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일본의 대한정책을 비판하는 글도 종종 실려 민족운동사 측면에서도 의미가 있는 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