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올링거(F. Ohlinger) 부부가 발간한 한국 최초의 영문 잡지로서, 선교사들의 시각에서 본 한국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종교 · 언어 등에 대한 다양한 기사가 실려 있다.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올링거 부부는 1887년 12월 아펜젤러(H. G. Appenzeller)의 요청으로 내한하여 1888년 배재학당 내 삼문출판사(三文出版社, Trilingual Press)의 초대사장으로 부임하였다.
이 출판사는 국문 · 영문 · 한문 등의 활자를 갖추었으며, 감리교 선교부에서 운영했지만 초교파적인 문서사업을 펼쳤으며, 시설을 확충하고 미이미교회 인쇄소(The Korea Methodist Publishing House)로 개칭하였다.
올링거가 싱가포르로 전근가자 1892년 12월에 휴간되었으나 1895년 1월 미국 북감리회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와 존스(G. H. Jones)가 발행인을 맡아 복간했으며 헐버트(H. B. Hulbert)가 부편집인으로 참여하였다. 1898년 12월호(통권 58호, 1899년 2월 간행)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코리안 리포지터리』는 한국 최초의 영문 잡지로서 월간으로 간행되었다. 1권 분량은 40쪽 정도였고, A5판보다 약간 작은 판형(140㎝×20.5㎝)이었다.
한국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종교 · 언어 등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올링거가 발행하던 1892년 1~12월의 편집체제는 「일반기사(Articles)」, 「관보(Extracts from The Daily Gazette)」, 「편집노트(Editional Notes)」, 「선교사 동정(Record of Events)」 등이었으며, 일반 독자의 「통신문(Correspondence)」이나 「의견 · 질문(Notes, Queries)」, 「리뷰(Review)」 등이 실리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한국의 정치 상황에 대한 내용은 많지 않았다.
아펜젤러와 헐버트가 발행하던 1895년 1~12월의 편집체제는 이전과 비슷했으며, 한국에 대한 책과 글을 소개하기 위한 「문학부(Literary Department)」가 마련되었다. 또 「편집부(Editorial Department)」에는 청일전쟁 · 갑오개혁 · 을미사변 등 한국의 정치적 상황이 소개되었고 이 같은 경향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896년의 편집체제도 큰 변화는 없으며, 1897년에는 「단신난(On Dit」)이 신설되었고 편집부에는 대한제국과 독립협회에 대한 기사가 많이 실렸다. 1898년에는 러시아의 각종 이권, 미국의 금광채굴권, 서울의 전차와 전기, 러 · 일 관계, 독립협회 등 정치 · 경제적 기사들이 이전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였다.
폐간의 이유는 발간 업무를 맡은 원로 선교사들의 귀국과 미납된 구독료의 수금 때문이었다. 이후 선교사들이 발간하는 영문 잡지의 전통은 『코리아 리뷰』로 계승되었다.
『코리안 리포지터리』는 한국에서 영문으로 간행된 최초의 잡지이며 한국의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 풍습 · 종교 · 언어 등을 해외에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한국에 파송될 예비 선교사들에게 각종 정보를 사전에 제공한 잡지이다. 또한 1890년대 외국인들의 한국 인식을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