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치는 1582년에 마카오에 도착한 뒤 광동성(廣東城)과 남경(南京)을 거쳐 1600년에 북경에 진출하여 활동하면서 당시 중국 최고의 지식인이자 고관들인 풍응경(馮應京)·서광계(徐光啓)·이지조(李之藻) 등과 교유하여 이들을 천주교에 입교시키고, 이들의 도움을 받아 1601년에 『천주실의(天主實義)』을 저술하여 1603년에 간행하였다. 또 이들과 지속적인 접촉을 가지는 과정에서 당대 중국의 문화 풍토에 보다 더 깊이 순화되어 가면서 자신과 이미 천주교를 받아들인 중국 지식인들 간의 대화를 더욱 심도 있게 다룬 책을 저술했는데, 이것이 『기인십편』이다. 이지조의 서문을 붙여 1608년 상·하 2권 1책으로 간행하였다. 1629년에 편찬된 『천학초함(天學初函)』과 청나라 때 편찬된 『사고전서(四庫全書)』에 수록되었다.
이 책의 본문은 모두 10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권에는 16편이, 하권에는 710편이 수록되어 있다. 각 편마다 리치가 친분이 깊었던 이대(李戴)·풍기(馮琦)·서광계·조간변(曹干汴)·오재해(吳在海)·공도립(龔道立) 등과 천주교 신앙에 대해 진솔하게 대화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이들 중국 지식인들은 대부분 인격신을 받아들이고 믿으면서도, 현세에서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수양을 매우 중요한 것으로 보아 리치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이에 리치는 자신을 중국의 지식인들과 구분하여 특별히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에 나오는 ‘기인(畸人)’, 즉 ‘별난 사람’으로 자처하고 있다.
리치는 중국의 지식인들이 이 ‘현세의 삶’에 집착하고 있지만, 이 현세에서의 삶이란 그의 기독교적인 관점에 의하면, 바로 사후에 인간이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을 찾아가기 위한 ‘임시 숙소’에 불과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후의 ‘진정한 삶’을 찾기 위하여 덕을 쌓고 하느님께 의지하고 수양해 나가는 자신은 바로 ‘별난 사람’, 즉 ‘기인’일 수밖에 없다고 본 것이다.
『기인십편』은 일찍이 조선에 전해져 학자들 사이에서 읽혔는데, 안정복(安鼎福)은 1757년(영조 33)에 이익(李瀷)에게 보낸 서한에서 이 책의 내용에 대해 비판하였다. 또한 이 책은 1784년(정조 8)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돌아오면서 들여온 『천학초함』에도 들어 있었고, 김건순(金建淳)도 1789(정조 13)년 이전에 이 책을 읽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이 책은 늦어도 1757년부터 조선에 전래되어 천주교를 수용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