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기 한국 천주교회의 교육사업은 처음에 국민교육과 기초교육에 치중했다. 1890년부터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고 있던 제8대 조선대목구장(朝鮮代牧區長)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주교는 처음에 안중근(安重根, 토마스)과 같은 한국인 신자들의 가톨릭 고등교육기관 설립요구를 거절하면서 이것이 신앙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1900년대 후반부터 태도를 변경하여 한국의 가톨릭 학교를 위한 교사(敎師)의 양성, 한국인 수도자와 성직자의 육성, 중등교육과 고등교육 및 실업 기술교육 실시 등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교구의 인적, 물적 자원이 제한되었기 때문에, 뮈텔 주교는 1908년 유럽 각국의 가톨릭 수도회 등을 순방하여, 한국에서 선교하면서 중고등 교육을 담당할 단체를 초빙하고자 노력했고, 그 결과, 독일의 상트 오틸리엔에 거점을 둔 베네딕도회(The Congregatio of St. Ottillien O.S.B, 芬道會)가 이 제안을 수락했다.
1909년 2월 베네딕도회는 사우어(Sauer, 辛, 18771950) 신부 등 2명의 수사신부를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서울 백동(柏洞, 현재의 혜화동)에 정착하여 낙산(駱山) 아래 현재의 가톨릭대학 성신교정 일대 약 3만 평의 부지를 매입하고 3층으로 된 벽돌조 수도원 건물을 신축하여 1911년 완공하였다. 베네딕도회는 1910년 숭공학교(崇工學校)를 세워 실업교육을 실시하였으며, 1911년 9월 16일에는 사범교육을 담당할 숭신학교(崇信學校)를 설립하여 학생들을 모집했다. 시험으로 선발된 1528세의 남학생들은 2년 동안 종교학, 윤리학, 교육학, 한국어, 한문, 일본어, 세계사, 지리, 수학, 박물학, 음악, 미술, 체조 등의 과목을 학습했다. 당시 교사진은 한국인 2명과 니바우어 신부, 엑카르트 신부 등 2명의 독일인 수사로 총 4명이었다. 초대 교장은 어학자인 베네딕도회 엑카르트(Eckardt, 玉) 신부였고, 제2대 교장은 로머(Romer, 盧) 신부였다. 베네딕도회 부원장이던 니바우어 신부는 한국어에 능통했고, 엑카르트 신부는 간단한 물리학 강의교재를 저술하고 한국어 문법서도 편집했다. 그러나 이 학교는 숭공학교와 달리 한국인들에게 그다지 인기가 없어서 개교 첫해 23명이던 지원자가 1912년 26명으로 늘었으나, 1913년에는 17명으로 줄었고, 그 다음해 지원자는 4명밖에 없어서 결국 폐교되었다. 이에 제1회 졸업생만 배출하고, 1913년 폐교되었다.
숭신학교가 단기간에 폐교하게 된 표면적인 이유는 학생 지원자의 급격한 감소 때문이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한국인들을 식민정책에 순응하는 천황(天皇)의 신민(臣民)으로 만들기 위해 고급기술 교육이나 비판적인 지성인을 양산하는 인문교양 교육을 가급적 회피하려는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 때문이었다. 특히 사범학교 교육은 대한제국기부터 시작된 교육구국(敎育救國) 운동의 분위기 속에서 한국인들에게 애국사상과 독립정신을 고취할 요소들이 다분하였기 때문에 총독부가 민간단체에 사범학교 교육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