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비스트는 벨기에 출신으로, 1657년 중국 선교를 지원하여 1659년 중국에 입국한 후 서안(西安)에서 전교하였고, 1660년 흠천감(欽天監) 감정(監正) 샬 폰 벨(J. A. Schall von Bell1, 湯若望)의 요청으로 북경에 진출하였다. 그는 이후 아담 샬을 보좌하며 천주교의 전교와 천문 역법의 업무에 힘썼고, 양광선(楊光先)이 1664년에 주도한 역국대옥(曆局大獄)에 샬 폰 벨 등과 함께 연루되었다가 다음해 사면을 받았다. 이어 1668년 역법에 관해 상소하여 흠천감 감정 양광선이 올린 1669년도 역서(曆書)의 오류를 지적했는데, 20명의 고위 관리와 중요 역법가들로 위원회를 구성하여 철저히 조사하고 실험한 결과, 그의 지적이 합당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에 그는 양관선을 대신해 흠천감을 맡아 일하면서 선교활동을 전개하였고, 샬 폰 벨과 처형당한 5명의 흠천감 감원들도 복권되었으며, 광동에 감금당해 있던 선교사들도 자기 교회당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페르비스트는 중국에서 활동하면서 천문 역법뿐만 아니라 세계 지리와 지도, 천주교 등 다양한 유럽 문화를 소개한 20여 종의 저술을 남겼다. 이러한 여러 저술들 가운데 『곤여도설(坤與圖說)』은 그가 흠천감을 맡고 있을 때인 1672년에 북경(北京)에서 상·하 2권 1책으로 간행한 세계 지리서이다. 이 책은 2년 뒤인 1674년에 제작된 그의 세계 지도인 「곤여전도(坤與全圖)」를 해설한 책이 아니라, 알레니(Giulio Alleni, 艾儒略)의 『직방외기(職方外紀)』를 계승한 저술로, 『직방외기』와 함께 한문지리서의 2대 명저로 거론되고 있다.
이 책의 상권에는 곤여(坤與)에서 인물에 이르기까지 15조항에 달하는 지리 통론의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그리고 하권에는 오대주(五大洲) 각국의 풍토·인정·명승 등에 관한 인문지리 내용과 사해총설(四海總說), 해상(海狀)·해족(海族)·해산(海産)·해선(海船) 등 해양지리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은 일찍이 조선에 전해져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읽혔다. 우선 이익(李瀷)의 『성호사설(星湖塞說)』에 『곤여도설』에 대한 언급이 나오고, 또한 이익의 제자인 신후담(愼後聃)의 저술 가운데에도 『곤여도설』을 읽고서 지은 「곤여도설변제(坤與圖說辨題)」가 들어 있다. 아울러 박제가(朴齊家)와 서유본(徐有本)의 문집과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도 『곤여도설』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러므로 『곤여도설』은 18세기 이래 조선에 전해져 지식인들이 중국 중심의 세계관을 극복하고 세계 지리 지식의 지평을 넓히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