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전교를 목적으로 1582년 마카오에 도착한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teo Ricci)는 1583년 광동성(廣東省) 조경(肇慶), 1589년 소주(韶州), 1595년 남경(南京)으로 갔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이후 남창(南昌)에서 약 3년을 보내며 수학과 기예 등 서양학문을 매개로 지식인들과 교유하였다. 그들 중 건안왕(建安王)을 1595년 봄 리치가 남포(南浦)에서 만났을 때 서양인의 우정에 대해 질문받자 이를 계기로 아리스토텔레스와 키케로 등의 우정론을 바탕으로 교우 관계에 대해 저술해 풍응경(馮應京)과 구여기(瞿汝夔)의 서문을 갖춰 남창에서 간행한 것이 『교우론(交友論)』이다.
이후 『교우론』은 벗을 중시하는 유가 지식인들에게 큰 호응과 반향을 일으켜 1603년 베이징에서 재판되는 등 중국 여러 지역에서 수차례 중간되었다. 1629년 이지조(李之藻)가 편찬한 『천학초함(天學初函)』과 청나라 『사고전서(四庫全書)』에도 수록되었다.
『교우론』은 1권 1책으로 되어 있다.
『교우론』은 총 32면으로 장절 구분 없이 모두 100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100개의 항목을 주요 주제별로 분류하면 ‘벗의 정의’, ‘벗 사귐의 목적’, ‘벗의 진위 판정’, ‘벗 사귐의 원칙’, ‘벗 사귐의 태도’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벗의 정의에 대해서는 “나의 벗은 타인이 아니라 바로 나의 반쪽이니, 바로 제2의 나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벗을 자신을 보듯 해야 한다.”, “벗과 나는 두 개의 몸이지만 두 몸 안의 마음은 하나이다.”라고 설명한다. 벗 사귐의 가장 큰 목적은 서로 돕기 위해서인데 곤궁에 처했을 때 뿐만 아니라 군자는 고귀한 행위를 하도록 서로 돕는 것이라 하였다. 또한 “좋은 벗과 사귀는 맛은 잃은 뒤에 더욱 깨닫게 된다.”, “세상에 벗이 없는 것은 하늘에 해가 없는 것과 같고, 몸에 눈이 없는 것과 같다.” 등의 구절은 교우론 저술의 핵심 의도를 잘 드러내고 있다.
동서양 우정론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 교리에 근거하지 않고 풀어 쓴 도덕 수양론 한문서학서 『교우론』은 특히 스토아 철학과 유가 전통 간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우정이라는 주1의 공통적 주제를 통해 두 사상을 하나로 융합시켰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를 지닌다. 또한 중국처럼 유가 지식인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친구들이 지녀야 할 우정이나 덕목에 대해 간단하면서도 감동적으로 그 핵심을 서술함으로써 리치는 이 책에 대한 중국 지식인들의 긍정적 호응을 바탕으로 천주교를 본격 소개하는 저서 『천주실의』 등을 펴낼 수 있었다.
『교우론』은 17세기 이래 일본과 조선에도 전해져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읽혔다. 조선에서는 이수광(李晬光, 1563-1628)이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이 책을 소개하였고, 유몽인(柳夢寅, 1559-1623)도 『어우야담(於于野談)』에서 이 책을 언급하였다. 또한 이익(李瀷)은 1754년 정항령(鄭恒齡)에게 보낸 편지에서 『교우론』을 인용해 "모두가 뼈에 사무치는 말"이라 하였고, 박지원(朴趾源)은 『연암집(燕巖集)』에서 벗을 ‘제2의 나’라고 인용하였다. 이규경(李圭景)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교우론』 구절로 문장을 완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