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사업을 목적으로 1909년 한국에 진출하여 백동(지금의 혜화동)에 수도원을 세운 ‘상트 오틸리엔의 베네딕도 수도회(Congregation of St. Ottillien O.S.B.)’가 모체이다. 서울에 진출한 베네딕도 수도회는 처음 계획했던 교육 사업이 어렵게 되자 선교 사업을 새로운 활동 분야로 정하고 서울과 멀리 떨어진 함경도 지역을 선교지로 결정하였다. 이와 같은상황을 수용한 교황청은 1920년 8월 5일 함경남북도 지역, 그리고 북간도(北間島)와 의란(依蘭) 지역을 서울대목구와 분리하여 원산대목구로 설정함과 동시에 이를 베네딕도 수도회에 위임하고 초대 대목, 즉 교구장으로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1877∼1950) 대수도원장을 임명하였다.
이후 수도회에서 원산대목구를 관할하게 되자 수도원이 포교지인 덕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1922년부터 부지를 매입하고 수도원 건물을 짓기 시작하여 4층 건물 가운데 1층이 완공됨에 따라 1927년 10월 10일부터 이전을 시작하여 11월 17일 수도원이 이전되었다. 덕원 수도원의 초대 원장으로는 크리소스토모 슈미트(Chrysostomo Schmid) 신부가 임명되었다.
수도원의 활동은 활발하게 진행되었지만 재정적인 어려움은 만성적인 것이었다. 일제 말기에 이르러 경제적인 어려움은 가중되었고, 또한 태평양 전쟁으로 말미암아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여행도 제한되었다. 1942년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가 폐쇄되어 양쪽의 신학생들이 덕원신학교로 옮겨오면서 거주 문제도 대두되었다. 또한 1945년 5월 신학교 건물이 일제에 의해 징발되면서 수도원 건물이 학교 겸 숙소가 되어 어려움이 더 심화되었다.
8·15해방과 더불어 진주한 소련군과 새로 수립된 북한 정권은 수도원에 적대적이었는데, 처음에는토지개혁으로 농지와 전답을 몰수하였고, 1948년에는 정치보위부를 통해 수도원 폐쇄조치를 내렸다. 이후 성직자, 수도자들이 다양한 이유로 한 사람씩 체포되었고, 결국 1949년 5월 9일과 10일 이틀에 걸쳐 대수도원장 사우어 주교를 비롯한 남아있는 모든 성직자들과 외국인 수도자들이 체포되었다. 또한 한국인 수사와 신학생들을 내쫓고 수도원과 신학교를 몰수함으로써 덕원 수도원의 역사는 막을 내리게 된다. 6·25전쟁 이후 베네딕도회는 왜관에 정착지를 마련하고 1955년 7월 3일 새로 건립한 수도원의 낙성식을 거행함으로써 왜관수도원이 시작되었다.
교육사업 만을 하던 서울 수도원과 달리 덕원 수도원에서는 몇 가지 활동들을 진행했다. 첫 번째가 의료 봉사활동이었다. 1928년 5월 정식으로 일제의 인가를 얻고 의원을 개설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극빈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하는 등 자선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의료 활동은 선교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고, 1929년 여름에는 작은 병원을 건립하였으며, 1933년과 1934년 이를 다시 증축하였다.
두 번째의 활동은 농공활동이었다. 서울 수도원에 있었던 목공장, 철공장, 농장 등이 덕원으로 이전되었고, 이것들이 확대되면서 큰 결실을 얻게 되었다. 농장이 확대되면서 제분소가 건립되었고, 육림, 원예, 양봉 사업이 새로 운영되었다. 농장 경영과 건축 사업은 가난한 신자들의 구빈에 큰 도움이 되었다.
세 번째는 출판, 인쇄활동이었다. 1927년 인쇄소를 설립하면서 이러한 활동이 시작되었는데 이 곳에서 교리서, 기도서, 예식서 교리 교재, 교양서 등이 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