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德源 聖 Benedictus 修道院)은 교육 선교를 목적으로 1909년 한국에 진출해, 백동(지금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에 수도원을 세운 ‘상트 오틸리엔 베네딕도 수도회(St. Ottillien O.S.B.)’가 모체이다. 베네딕도회는 조선 진출의 목적이었던 교육사업이 어렵게 되자 새 선교지로 원산교구를 선택하였다. 1920년 8월 5일 로마 교황청은 함경남도, 함경북도와 간도(間島), 1921년 3월 19일 만주(滿洲)의 연길(延吉)과 의란(依蘭)지역까지 서울대목구와 분리해 원산대목구로 설정하고 이를 백동 베네딕도 수도회에 위임하며, 초대 대목, 즉 교구장으로 보니파시오 사우어(Bonifatius Sauer) 대수도원장을 임명하였다.
수도원을 옮기게 되자 1922년 원산 시내에서 4km 떨어진 덕원에 부지를 매입하고 건축기사인 피어하우스(Vierhaus, Kajetan) 신부가 중세 독일 수도원을 본 뜬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설계해 1926년 7월 기공하고 1927년 11월 16일 축성식을 겸한 입주식을 개최해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시대를 열었다. 초대 원장은 크리소스토모 슈미트(Chrysostomo Schmid) 신부였으며, 수도자의 총수는 독일인 신부 14명, 수사 12명(한국인 3명 포함)이었다.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개원한 이후 1940년까지는 교구의 정착과 발전의 시기였다. 정예 인력을 기반으로 활발히 활동해 교구 설립 당시 빈약했던 원산교구의 교세는 나날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여러 면의 시대적 고난도 닥쳤다. 일제강점기 말기, 가중된 경제적 어려움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독일인 성직자와 수도자들의 운신도 제한받았다. 1942년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가 폐쇄되자 신학생들이 덕원신학교로 옮겨오면서 거주 문제도 대두되었다. 그 위에 1943년 8월에는 원산 해성학교가 교실 3개만 남겨두고 모두 징발 당했고, 1945년 7월 16일에는 덕원신학교가 일본 군대에 의해 강제 점유되기도 하였다.
1945년 8·15 해방과 더불어 진주한 소련군과 새로 수립된 북한 정권은 수도원에 적대적이었다. 처음에는 토지개혁으로 농지와 전답을 몰수하였고, 1948년에는 정치보위부를 통해 수도원 폐쇄 조치를 내렸다. 이후 성직자, 수도자를 체포하기 시작하여 결국 1949년 5월 9일과 10일에 걸쳐 사우어 주교를 비롯해 남은 모든 성직자와 수도자를 체포하였다. 또한 한국인 수사와 신학생들을 내쫓고 수도원과 신학교를 몰수함으로써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 시대는 막을 내렸다.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이 전력을 기울인 사업은 교육사업이었다.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은 일차적으로 1927년 12월 1일 서울신학교와 동일하게 소신학교(小神學校)와 대신학교(大神學校) 과정의 덕원신학교를 개교하였다. 또한 교육 선교를 표방하며 빈민 아동을 위한 교육을 목적으로 거의 모든 포교 지역에 해성학교를 설립하였고, 또한 한국 청년들의 배우고자 하는 교육열에 부응하면서 동시에 교인을 만드는 지름길로 본당과 공소에 야학교를 설립하였다.
덕원 성 베네딕도 수도원은 교육사업 외에도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그 첫 번째가 의료 봉사활동이다. 1928년 5월 일제의 정식 인가를 얻고 의원을 개설하면서 경제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극빈자들에게 무료 진료를 베푸는 등 자선 사업을 계속하였다. 또한 시약소도 운영했는데, 이러한 의료 활동은 선교에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1929년 여름에는 작은 병원을 건립하였고, 1933년과 1934년에 이를 다시 증축하였다.
두 번째는 농공활동이다. 서울수도원에 있던 목공장, 철공장 등을 덕원으로 이전 확장해 큰 결실을 얻었다. 농장의 확대, 제분소의 건립, 육림, 원예, 양봉 등 사업을 운영하며 이 분야를 맡을 한국인 수사들도 양성하였다. 농장 경영과 건축 사업은 가난한 신자들의 구빈에 큰 도움이 되었다.
세 번째는 출판 및 인쇄활동이다. 1927년 인쇄소를 설립해 교리서, 기도서, 예식서, 교리 교재 등을 간행하였다. 더불어 교회 서적이 아닌 학술서, 교양서, 농업, 공업, 건축에 관한 기본서 및 어학 관련 책 등 실용 서적도 간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