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 ( Benedictus )

천주교
단체
성 베네딕토(St. Benedictus, 480~547)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남녀 수도회들의 연합으로 가톨릭 ‘수도승 수도회(monastic order)’ 가운데 하나.
이칭
이칭
분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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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성 베네딕토(St. Benedictus, 480~547)의 수도 규칙을 따르는 남녀 수도회들의 연합으로 가톨릭 ‘수도승 수도회(monastic order)’ 가운데 하나.
설립목적

일정한 장소에 정주하면서 공동체 생활을 통하여 ‘하느님을 찾는 삶’을 추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지역 교회 필요성에 부응하기 위해 교육, 학문, 선교 활동도 진행하고 있다.

연원 및 변천

베네딕도회는 6세기 초 베네딕도 성인이 이탈리아의 수비아코(Subiaco)와 몬테 카시노(Monte Casino) 등에 수도원을 설립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577년경 몬테 카시노 수도원이 롬바르드 족 침입으로 완전히 파괴되면서, 일부 수도승들은 로마로 이주해 정착하였다. 596년 그레고리오(Gregory, 590~604) 1세 교황 때 영국에 진출하여 새 수도원을 설립하였고, 8세기에 다시 이곳에서 독일 지역에 수도승을 파견함으로써 유럽 전역에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이 확산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8세기 말 9세기 초에는 카알 대제(大帝) 같은 『베네딕도 규칙서』 옹호자들 덕으로 규칙서와 함께 수도 생활도 유럽지역에 널리 전파되었다. 그러나 9세기부터 10세기 초까지는 아니안의 베네딕도 사망과 같은 수도회 내부 사정과 야만족 침입과 같은 외부 사정 등으로 성장이 정체되었다.

10세기 중반 이후 수도 생활뿐 아니라 교회 내 개혁운동까지 활발해지면서 중흥의 전기를 맞게 되지만, 수도 생활 개혁 과정에서 다양한 쇄신 방법과 형태를 표방하는 수도회들이 다수 탄생하게 되었다.

중세기 말엽 정치·종교·사회적 혼란이 커지자 수도회는 다시 쇠퇴기를 맞았다. 15~16세기에 다시 수도회 정비를 시작하여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지만, 이번에는 종교개혁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7세기에 여러 형태의 베네딕도회 수도 생활이 새롭게 전개되면서 발전의 전기를 다시 맞게 되나, 18세기 계몽주의 등장, 프랑스 혁명, 독일의 국유화 등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세기 중반까지 수도 생활이 크게 위축되었다. 19세기 중엽부터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지에서 수도 생활이 부흥하게 되었다.

한국 진출

베네딕도회 회원이었던 암라인(Andreas Amrhein) 신부는 1884년 베네딕도회적 방식에 선교 소명을 결합시켜 새로운 연합회를 창설하였는데, 이것이 나중에 조선에 진출하게 될 성 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이다. 이 연합회의 특성은 ‘안으로는 수도승, 밖으로는 선교사’(intus monachus, foris apostolus)라는 표어에 잘 드러난다.

베네딕도회의 조선 진출은 당시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주교가 교황청 포교성성에 요청하여 이뤄졌다. 베네딕도회 조선 진출은 1909년 2월 사우어(Bonifatius Sauer, 辛) 신부와 다른 한명의 수도 신부가 조선에 입국 서울 백동(栢洞, 현 혜화동)에 자리를 잡고 활동을 시작함으로써 본격화되었다.

베네딕도회는 이곳에서 1927년까지 숭공학교[1910년(개교)~1920년(폐교)], 숭신학교(1911년)를 설립 운영하며 목공, 철공, 원예 등 7개 작업장에서 유능한 기능공들을 배출하였다. 원산교구가 설정되고 이 지역 선교를 위촉받으면서 1920년부터 서울에서 철수를 시작해, 1927년까지 함경남도 덕원으로 이주를 마쳤다.

1927년부터 1949년까지는 원산교구의 사목을 담당하면서 학교, 유치원 운영, 시약소 개설, 출판 활동 등도 전개하였다. 그 결과 이전 당시 5개 본당, 7,500여 명이었던 신자는 12개 본당, 89개 공소, 11,004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1945년 분단과 함께 1946년 북한의 토지개혁, 1949년 북한 공산정권에 의한 신부, 수사들의 체포로 수도원도 폐쇄되었다. 1928년부터 1946년까지는 만주 간도 지방이 원산교구에 편입됨으로써 만주 지방 선교에도 나서게 되었다. 이곳에서는 본당 사목과 초등교육에 주력하였지만, 이곳도 중국의 공산화로 1946년부터 사실상 활동이 정지되었다.

1952년부터 현재의 왜관에 새로운 수도원을 설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3년부터 대구교구로부터 위임받은 6개 군의 사목을 담당하기 시작했고, 순심 중고등학교 인수, 성 마오로 기숙사 운영, 분도출판사와 인쇄소 설립 운영, 철공소, 목공소와 같은 작업장 운영, 현대식 농장 경영, 피정집 운영 등을 해왔다. 2014년 현재 왜관수도원에 121명, 경기도 양주의 요셉수도원에 13명의 회원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가톨릭대사전』5(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7)『옛 등걸에 새 순이』(왜관 수도원, 분도출판사,1984)
『원산교구 연대기』(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81)
「독일 베네딕도회의 한국 진출과 교육 활동」(장정란, 『인간연구』5, 2003)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osb.or.kr)
집필자
박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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