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계성당 ()

천주교
단체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동부동(東部洞)에 있던 천주교 평양교구 소속 침묵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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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평안북도 강계군 강계읍 동부동(東部洞)에 있던 천주교 평양교구 소속 침묵의 성당.
개설

1933년에 설립되었다가 1949년 북한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었다. 평안북도 강계군(江界郡)과 희천군(熙川郡) 일대가 사목 관할 지역이었으며, 관하에 만포(滿浦)·별하(別河)·전천(前川)·개고(价古) 등의 공소(公所)가 있었다.

연원 및 변천

강계 지방에 천주 신앙이 전파된 것은 1926년 중강진 일대를 중심으로 선교활동을 하던 미국 메리놀외방전교회(M. M.)의 선교사 캐시디(J. Cassidy, 姜) 신부에 의해서였다. 이때 형성된 강계 신앙 공동체는 1931년 제2대 평양지목구장 모리스(J.E. Morris, 睦 요한) 신부가 파견한 전교회장 이병모(李炳模)의 열성적인 전교로 신자 수가 증가하게 되었고, 그 결과 1933년 강계성당이 설립됨과 동시에 메리놀회의 듀피(P. Duffy, 都 파트리치오)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듀피 신부는 이후 성당을 신축하고 학교를 개설하였으며, 지역 선교에 노력하여 만포·별하·전천·개고 공소들을 설립하였고, 1937년에는 빈민 아동 교육기관인 소화학원(小化學院)을 개원하는 등 성당 정착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1938년 6월 듀피 신부가 평양에 있는 신리(新里)성당으로 전임되면서 강계성당은 중강진성당의 관할 공소가 되었고, 1942년에는 의주성당, 1943년에는 평양의 기림리성당에 속하였다. 1944년 4월 홍도근(洪道根, 요한)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재설립되었다.

이후 강계성당은 3대 주임 장두봉(張斗鳳, 안드레아) 신부 재임 시기에 8·15광복을 맞았다. 북한 정권 하에서 1946년 9월 4대 주임으로 부임한 한도준(韓道俊, 마태오) 신부는 이듬해 3월 소화유치원을 개설하고 평신도 단체들을 설립하는 등 성당 발전에 힘썼으나, 성당은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1949년 7월 8일 5대 주임 석원섭(石元燮, 마르코) 신부가 성당에 부임한 지 6개월 만에 정치보위부원들에게 체포되었고 그 다음날 성당은 폐쇄되었다. 그때까지 성당의 평신도 신심 단체로 부인회와 미혼 여성들의 모임인 성체회 등이 있었고, 소화학원과 소화유치원도 운영되고 있었다.

현황

역대 주임 신부 가운데 홍도근·장두봉·석원섭 신부는 현재 한국 천주교의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 시성이 추진되고 있다.

참고문헌

『북녘 땅의 순교자들』(평양교구 순교자사료수집위원회 편, 가톨릭출판사, 1999)
『한국가톨릭대사전』1(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천주교 평양교구사』(평양교구 편찬위원회 편, 분도출판사, 19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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