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령동성당 ()

천주교
단체
중국 간도성 연길현 차조구(茶條溝)에 있던 천주교 연길교구 소속 침묵의 성당.
이칭
이칭
차조구성당
목차
정의
중국 간도성 연길현 차조구(茶條溝)에 있던 천주교 연길교구 소속 침묵의 성당.
개설

1928년 6월 간도성 연길현 대령동(大嶺洞)에 설립되었고, 인근의 차조구(茶條溝) 즉 지금의 옌벤조선족자치주 안투현(安圖縣) 차타오춘(茶條村)으로 이전되었다가 1946년에 폐쇄되었다. 일명 차조구성당으로, 주보는 「세례자 요한」이다.

연원 및 변천

1890년대 말 간도 지역에 처음으로 천주 신앙이 전파된 이래 각처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1909년에는 연길현 용정(龍井)과 화룡현 영암촌(英岩村, 즉 三元峰)에, 1910년에는 조양하(朝陽河)의 팔도구(八道溝)에 각각 성당이 설립되었다. 이때 대령동 지역에도 팔도구성당 소속의 공소(公所)가 설정되었으며, 1926년 7월 초에는 초대 원산대목구장 사우어(B. Sauer, 辛 보니파시오) 주교에 의해 팔도구성당의 보좌였던 엠머링(Emmerling Pius, 嚴威明 비오) 신부가 성당을 설립하기 위해 대령동 공소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엠머링 신부는 이곳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다음해 철수하였으며, 이 공소는 계속해서 팔도구성당 공소로 남아 있게 되었다.

1928년 6월 말 사우어 주교는 라프(C. Rapp, 朴敎範 콘라도) 신부를 대령동성당의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이에 그는 7월 1일 대령동에 부임하였고, 이듬해에는 아쇼프(S. Aschoff, 安 실베스테르) 신부를 보좌로 맞이하여 1930년에 작은 성당과 사제관을 완공하였다. 그에 앞서 1928년 7월 19일에는 원산대목구에서 연길지목구가 분리 설정되면서 대령동성당도 새 지목구 소속이 되었다. 이어 1929년 2월 5일 초대 연길지목구장으로 임명된 브레허(T. Breher, 白 테오도르) 신부는 1931년 가을에 라프 신부를 부지목구장으로 임명함과 동시에 뮐러(E. Müller, 睦 엔젤베르토) 신부를 2대 대령동성당 주임으로 임명하였으나, 그는 1932년 5월 27일 장티푸스로 사망하였다.

이후 대령동성당 신부 자리는 공석으로 있다가 1933년 12월 콜러(S. Koller, 李 살바토르) 신부가 3대 주임으로 임명되었으나, 1935년 3월 공산당에 의해 성당과 부속 건물들이 전소되었다. 다행히 화를 면한 콜러 신부는 차조구로 거처를 이전한 뒤 성당 건축을 시작하여 같은 해 11월 30일 브레허 아빠스의 집전 이래 봉헌식을 가졌으며, 동시에 성당 이름을 ‘차조구성당’으로 개칭하였다. 그 외에도 콜러 신부는 해성학교와 신심 단체들을 설립하고 공소 신설에도 노력하였다. 1946년 만주를 점령한 소련군에게 성당과 부속 건물들을 빼앗긴 뒤 콜러 신부는 체포되었고, 이로 인해 성당은 폐쇄되었다. 콜러 신부는 강제 수용소 생활을 겪은 뒤 석방되어 독일로 귀환하였다.

참고문헌

『분도통사』(요한네스 마르 지음·왜관수도원 역편, 분도출판사, 2009)
『은혜의 50년』(부산올리베따노성베네딕도수녀회 60주년준비위원회 편, 성베네딕도수녀원, 1995)
『함경도 천주교회사』(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5)
집필자
차기진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