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7년 5월 안변성당으로 설립되었다가 1896년 2월 내평(內坪)성당으로, 1930년 초 고산성당으로 개칭되었고, 1949년 북한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었다. 주보는 「순교자의 모후」이다.
함경도의 안변과 고산 일대에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것은 1860년대 말이었다. 이때 안변의 근피골(안변군 신고산면 죽근리의 根皮洞)과 피대(신고산면 삼방리의 備垈)에 살던 주민들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고, 1880년대 초부터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이곳 신자들을 방문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1887년 5월에는 제8대 조선대목구장 뮈텔(G. Mutel, 閔德孝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새로 입국한 르메르(L. Le Merre, 李類斯 루도비코) 신부를 함경도 지역으로 파견하였고, 이때 르메르 신부가 안변의 강성골(신고산면 江城里)에 거처를 정하면서 ‘안변성당’이 설립되었다.
이후 안변성당에는 1891년 4월에 임명된 2대 주임 샤르즈뵈프(J. E. Chargeboeuf, 宋德望 스테파노) 신부, 같은 해 11월에 임명된 3대 주임 르장드르(L. Le Gendre, 崔昌根 루도비코) 신부를 거쳐 1893년 4월에는 블라두(T. Bouladoux, 羅亨黙 토마스) 신부가 4대 주임으로 임명되어 복골(신고산면 洑谷)에 거처하였다. 그러나 블라두 신부는 여러 차례의 교안(敎案)으로 어려움을 겪었고, 1896년 2월에는 성당을 내평(신고산면 내평리)으로 이전함으로써 그 이름이 ‘내평성당’으로 개칭되었다. 당시 성당의 사목 관할 구역은 안변·평강·회양과 강릉 일부 지역이었고. 신자 수는 1천여 명이었다. 이 내평성당은 7대 주임 뤼카(F. Lucas, 陸嘉恩 루도비코) 신부 재임기인 1920년 8월 5일 서울대목구에서 분리된 원산대목구(元山代牧區)[성베네딕도회 오틸리엔 연합회 관할]로 이관되었고, 1921년 5월에는 슈넬(S. Schnell, 成來純 세바스티아노) 신부가 공소(公所)를 신설하는 등 지역 선교에 힘쓰다가 1930년 초에는 신고산역 인근으로 성당과 사제관을 이전하였다. 동시에 내평성당은 ‘고산성당’으로 개칭되었고, 1933년에는 포교 성 베네딕도 수녀회 분원이 설립되면서 성당 구내에 시약소(施藥所)가 개설되었다. 이어 1934년에는 노이기르그(P. Neugirg, 兪順和 플라치도) 신부가 11대 주임으로 부임하여 회장 김경신(金京信, 요한)의 도움 아래 성당 건축을 시작하였고, 1937년 6월 20일에는 대지 2,500평에 건평 122평의 새 성당을 완공하여 봉헌식을 가졌다.
고산성당은 노이기르그 신부의 뒤를 이어 12대 주임으로 부임한 오트(K. Ott, 吳 쿠니베르트) 신부 재임기인 1940년 1월 12일 원산대목구에서 덕원면속구가 분리 설정되면서 여기에 속하게 되었다. 그러나 광복 이후 북한 공산 정권이 수립되면서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949년 5월 11일에는 오트 신부와 수녀들이 체포되고, 성당과 교회 재산이 몰수되면서 침묵의 성당이 되었다.
역대 신부 가운데 다베르나스(K. d'Averns, 羅國宰 카누트) 신부 신부와 오트 신부는 현재 한국 천주교의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 시성이 추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