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선교리성당으로 설립되었으며, 1944년 대신리성당으로 개칭되었다가 1949년에 폐쇄되었다. 사목 관할 구역은 평양시의 대동강 동쪽과 평안남도 대동군·강동군 일부 지역이었고, 관할 공소로는 논재[畓峴]·고둔[楸斌里]·쑥개[艾浦里] 등이 있었으며, 주보는 「성녀 막달레나」이다.
1930년대에 들어와 평양 관후리성당(館後里聖堂)의 신자 수가 증가하자, 메리놀외방전교회(M. M.)의 제2대 평양지목구장 모리스(J. E. Morris, 睦怡世 요한) 신부는 1934년 2월 15일 ‘선교리(船橋里)성당’을 분리 설립함과 동시에 양기섭(梁基涉, 베드로)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이후 양 신부는 6개월 만에 새 성당을 완공하여 같은 해 9월에 봉헌식을 가졌고, 성당 이름을 ‘신리(新里)성당’으로 개칭하였다. 이어 그는 다음해 1월 나자렛양로원과 영해고아원을 설립하였으며, 1936년에는 6년제 초등교육기관인 동평(東平)학교를 설립하였다. 또 청년 사목에 주력하여 1938년 8월 10일 평양·서울·대구대목구의 합동 청년 묵상 친목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1938년 9월 2대 주임으로 부임한 듀피(P. Duffy, 都 파트리치오) 신부는 성당의 안정에 노력하던 중 1941년 12월 8일 태평양전쟁이 발발함과 동시에 동료 선교사들과 함께 연금되었다가 다음해 미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이에 따라 1942년 2월에는 김필현(金泌現, 루도비코) 신부가 3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으며, 1944년 4월에는 그 뒤를 이어 서울대목구의 조인원(趙仁元, 빈첸시오) 신부가 4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가 동년 11월 서울로 복귀하였다. 이 해에 신리성당의 이름은 ‘대신리성당’으로 개칭되었다.
조인원 신부의 뒤를 이어 5대 주임으로 부임한 박용옥(朴龍玉, 디모테오) 신부는 일제 말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1945년의 광복을 맞이하여 신심 단체와 공소의 활성화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소련군의 진주로 다시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였고, 1948년에는 북한 공산 정권의 탄압으로 동평학교가 몰수되었으며, 이듬해 12월 7일에는 박 신부가 체포되면서 성당이 폐쇄되었다. 이후 대신리성당은 1950년 10월 유엔군이 평양을 탈환했을 때 듀피 신부가 다시 부임하여 문을 열고 12월 2일까지 사목하였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듀피 신부와 많은 신자들이 월남함으로써 침묵의 교회가 되었다.
역대 주임 신부 가운데 김필현 신부와 박용옥 신부는 현재 한국 천주교의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 시성이 추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