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6월 원산대목구 소속 성당으로 설립되었다가 1931년 이후 폐쇄되었고, 1936년 10월 연길지목구 성당으로 재설립되었다가 1946년 8월에 폐쇄되었다. 성당 주보는 「성 야고보」이다.
길림성 돈화현은 1900년대 초 북만주대목구의 중국인 성당이 설립되었다가 폐쇄된 곳으로, 1920년대 초부터 한국인 신자들이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자 원산대목구장 사우어(B. Sauer, 辛 보니파시오) 주교는 1926년 6월 모르겐슈바이스(L. Morgenschweis, 姜 리보리오) 신부를 초대 주임으로 임명하여 돈화성당을 설립하였고, 모르겐슈바이스 신부는 부임 직후 만주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러나 1931년 만주사변으로 이 지역이 일본의 지배 아래 들어가고, 마적들이 횡행하면서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고향으로 귀환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한국인들도 남쪽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때 모르겐슈바이스 신부도 돈화성당을 떠나 연길로 돌아갔으며, 그 결과 성당은 한동안 폐쇄되었다. 이에 앞서 1928년 7월 19일에는 원산대목구에서 연길지목구가 분리 설정되면서 돈화성당도 새 지목구 소속이 되었다.
1933년 이후 돈화 지역에는 비행장이 건설되고 철도가 개통되면서 인구가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1936년 여름에는 왕청현(汪淸縣) 명월구(明月溝)성당에 재임하던 슈래플(C. Schräfl, 周 코르비니아노) 신부가 돈화로 와서 성당을 수리하였고, 초대 연길지목구장 브레허(T. Breher, 白 테오도르) 신부는 같은 해 10월 20일 아커만(R. Ackermann, 田 라이문도) 신부를 2대 돈화성당 주임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돈화성당의 신자 수는 이미 870여 명을 헤아릴 정도였으나, 기존의 성당은 신자 수에 비해 비좁고 낡은 상태였다. 이에 아커만 신부는 성당과 사제관, 학교 건물의 개보수 공사를 시작하여 1937년 10월 24일 이를 완료한 뒤 브레허 주교의 집전(執典)으로 축성식을 가졌다. 이어 1941년에는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토 수녀회의 돈화성당 지원이 설립되었으며, 아커만 신부는 성당 신축을 시작하여 1942년 10월 브레허 주교의 집전으로 봉헌식을 가졌다. 이에 앞서 연길지목구는 1937년 4월 13일 대목구로 승격되었다.
1943년 3월에 아커만 신부는 하이글(G. Heigl, 許 군터) 신부를 보좌로 맞이하였다. 그러나 2년 뒤인 1945년에 소련군이 진주하면서 사목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이러한 상황에서 아커만 신부가 이듬해 8월 돈화성당을 떠나 팔도구(八道溝)성당으로 피신하다가 체포되면서 돈화성당은 폐쇄되었다. 이후 아커만 신부와 하이글 신부는 동료들과 함께 강제 수용소 생활을 겪은 뒤 석방되어 독일로 귀환하였다. 한편 1948년 5월 선교사들이 수용소에서 잠시 석방되었을 때, 렌츠(P. Lenz, 延 필립보) 신부가 돈화성당 주임으로 임명되어 선교활동을 한 적이 있지만, 얼마 안 되어 교회 재산이 몰수되면서 침묵의 성당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