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림성당 ()

천주교
단체
황해도 송림시 산서리(山西里)에 있던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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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황해도 송림시 산서리(山西里)에 있던 천주교 서울대교구 소속 침묵의 성당.
개설

1939년 겸이포성당으로 설립되었으며, 1947년에 송림성당으로 개칭되었고, 1950년 6월 초대 주임 유재옥 신부가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납치됨과 동시에 폐쇄되었다. 성당 주보는 「예수 성심」이다.

연원 및 변천

1900년을 전후해서 천주 신앙이 전파되기 시작한 황해도 황주군의 송림면 지역에는 1903년경 황주(黃州)성당 관할의 ‘송림공소(松林公所)’가 설립되었다. 이후 송림공소는 1916년에 황주성당이 폐쇄되면서 사리원(沙里院)성당 소속이 되었고, 1919년 겨울에는 공소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모은 기금을 바탕으로 경당을 건립하였다. 당시 송림 지역은 일제가 1914년에 설립한 겸이포(兼二浦)제철소(일명 송림제철소)를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인구도 증가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송림공소 신자들은 제9대 서울대목구장 라리보(H. Larribeau, 元亨根 하드리아노) 주교에게 여러 차례 신부 파견을 요청하였고, 1939년 7월 20일 신자들의 건의가 받아들여져 송림공소가 ‘겸이포성당’(1947년 행정 구역 개편과 동시에 ‘송림성당’으로 개칭됨)으로 승격됨과 동시에 강원도 양양성당에서 사목하던 유재옥(劉載玉, 프란치스코) 신부가 초대 주임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유재옥 신부는 지역 선교 활동과 함께 성당과 사제관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12월 3일에는 이를 완공하고 라리보 주교의 집전으로 성당(연와조 83평) 봉헌식을 가졌다. 동시에 겸이포성당은 유재옥 신부의 활발한 사목활동으로 청년회·성가대 등 평신도 단체가 활성화되고 관할 10여 개 공소도 안정적으로 유지되었다. 그러던 중 태평양전쟁 발발한 직후인 1941년 12월 8일 유 신부는 미국인 선교사들과 내통하여 제철소의 기밀을 탐지했다는 혐의로 일제 총독부에 의해 체포 감금되었으며, 5개월 동안 옥고를 치른 다음해 4월 18일에 석방되었다. 또 성당 건물은 1945년 7월 17일 총독부의 강압에 의해 잠시 식민지 교육의 장소로 이용되었다.

광복 이후 소련군정이 시작되고 이어 북한 공산정권이 수립되면서 유재옥 신부와 신자들은 위협을 느꼈지만, 유재옥 신부는 모든 것을 감수하면서 사목에 열중하였다. 또 시간이 지나면서 위험이 커지자 신자들이 자주 성당을 찾아가 유 신부에게 남하할 것을 권유하였으나, 유 신부는 이를 거절하였으며, 대신 성당에 있던 이계광(李啓光, 요한) 부제와 김창린(金昌麟, 필립보) 신학생에게 남하를 지시하였다. 유 신부는 1950년 6월 24일 밤에서 25일 새벽 사이에 정치보위부원들에게 납치되었고, 해주 교화소로 이송되었다가 10월 5일 해주 해변 모래사장에 생매장되었다. 유 신부가 납치됨으로써 송림성당은 폐쇄되었다.

현황

역대 신부 중에서 유재옥 신부는 현재 한국 천주교의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 시성이 추진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가톨릭대사전』7(한국가톨릭대사전편찬위원회 편, 한국교회사연구소, 1999)
『황해도천주교회사』(한국교회사연구소 편, 황해도천주교회사 간행사업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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