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6년 봄 평양성 밖의 평천리에서 평양성당으로 설립되었고, 1898년 5월 평양시 관후리(館後里) 251번지로 이전되었으며, 1934년 2월 15일 대신리(大新里)성당을 분리 설립함과 동시에 관후리성당으로 개칭되었다. 1943년 3월 9일 평양대목구의 주교좌성당이 되었고, 1949년 공산당에 의해 폐쇄되었다. 주보는 「평화의 모후」이다.
평안도 지역에 천주 신앙이 전파된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丙寅迫害) 이전으로, 이 박해 때에는 평양 지역에서 유정률(劉正律, 베드로) 성인 등 여러 명의 순교자들이 이었다. 박해 이후 1881년부터 김기호(金起浩, 요한) 회장의 선교활동으로 평안도와 황해도 지역에 새신앙 공동체들이 형성되었으며, 1895년 가을에는 황해도 수안(遂安)에 사목 중심지를 두고 선교하던 파리외방전교회(M. E. P.)의 르장드르(L. Le Gendre, 崔昌根 루도비코) 신부가 평양성 밖의 평천리(현 평양직할시 평천구역) 산명모루[山明隅]에 있는 조신종(曺信宗, 야고보)의 집을 방문하여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였다. 여기에 고무된 평양 신자들은 곧 산명모루에 있는 기와집을 성당으로 매입하였고, 르장드르 신부가 1896년 봄에 이곳으로 거처를 이전하면서 ‘평양성당’이 설립되었다. 이후 르장드르 신부는 평양시 관후리의 장대재[將臺峴]에 새 부지를 매입하여 1898년 5월 9일 성당을 그곳으로 이전하였다.
2대 주임 르메르(L. Le Merre, 李類斯 루도비코) 신부는 1900년 봄에 고딕식 연와조 성당을 완공하고, 1905년 9월에는 기명학교(箕明學校)를, 1906년 5월에는 성모여학교를 설립하는 등 성당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힘썼다. 그 사이 평양성당은 진남포·영유·의주·비현·신의주 등지에 자성당(子聖堂)들을 분리해 설립하였다. 3대 주임 김성학(金聖學, 알렉시오) 신부 재임기인 1927년 3월 17일에는 평안도 지역이 서울대목구에서 분리되어 평양지목구로 설정됨과 동시에 메리놀외방전교회(M. M.)에 그 사목이 위임되었다. 그 결과 평양성당은 지목구의 행정 및 사목 중심지가 되었다. 1929년 3월에 기명학교와 성모여학교를 통합하여 성모보통학교(6년제)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1931년 3월 서포(西浦)에 지목구 청사 및 성당이 건립되면서 지목구의 행정 중심지가 그곳으로 이전되었다.
평양성당은 7대 및 9대 주임 코너스(J. Connors, 權 요셉) 신부 재임기인 1934년 2월 15일 선교리성당(船僑里聖堂, 1944년 대신리성당으로 개칭됨)이 분리 설립되면서 ‘관후리성당’으로 개칭되었다. 1940년 1월에는 평양의 서부 지역을 분리시켜 기림리(箕林里) 성당을 설립했다. 또 1939년 7월 11일에는 평양지목구가 대목구로 승격되고, 1943년 3월 9일 한국인 홍용호(洪龍浩, 프란치스코) 주교가 메리놀회 오세아(W. O'Shea, 吳 윌리엄) 주교의 뒤를 이어 평양대목구장에 임명되면서 주교좌성당이 되었으나, 일제강점기 말인 1944년 2월에 성당과 부속 건물들이 징발되었다. 이에 성당에서는 광복 이후인 1946년 3월 공산 정권과 끈질기게 교섭하여 징발되었던 건물들을 환수 받고, 이듬해인 1947년에 성당 신축 공사를 시작하여 1948년 말에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이후 1949년 5월 14일 홍용호 주교, 6월 10일 12대 주임 김필현(金泌現, 루도비코) 신부, 12월 7일 보좌 서운석(徐雲錫, 보니파시오) 신부가 각각 공산당에게 피랍되면서 침묵의 성당이 되었다.
역대 주임 신부 가운데 홍용호 주교와 홍건항(洪健恒, 갈리스토) 신부, 김필현 신부, 보좌 서운석 신부 등은 현재 한국 천주교의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되어 시복 시성이 추진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