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우 초상 및 함은 조선 후기의 문신 서경우의 초상화와 보관용 목재 영정함이다. 서경우가 광해군 대인 1613년 익사공신으로 녹훈되어 하사받은 초상화로 여겨지며, 17세기 초 공신 초상화의 특징이 잘 드러나는 작품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익사공신의 훈적이 삭제되었으나, 공신 초상화는 이전의 관례와 달리 폐기되지 않고 후대에 전해진 희귀한 사례에 속한다.
서경우(徐景雨, 1573~1645)는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시백(施伯), 호는 만사(晩沙)이다. 1613년(광해군 5) 광해군의 친형 임해군의 역모 사실을 밝히는데 공을 세운 신하 48명은 익사공신(翼社功臣)으로 책록되어 초상화를 하사 받았다. 당시 서경우는 3등공신으로 녹훈되었기에 이때 제작된 초상화로 여겨진다.
초상화는 화면 왼편을 향하여 몸을 살짝 돌린 자세로 의자에 앉은 전신상이다. 오사모를 쓰고 검은 단령을 입고 양손은 소매 속으로 감추고 있으며, 백한흉배와 삽은대(鈒銀帶)를 착용하고 있다. 단령의 트임 사이로 녹색 안감과 청색의 첩리가 보인다.
바닥에는 화려한 채전이 깔려 있다. 돗자리가 덮인 발받침 위에는 양쪽으로 벌린 흑피혜(黑皮鞋)가 일부만 보인다. 화면 우측에 쓰여 있는 글씨는 "우의정만사서공화상(右議政晩沙徐公畵像)"으로 조선 후기에 후손이 적은 것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목재 영정함이 함께 전하고 있다.
초상화의 크기는 세로 175.4㎝, 가로 98.8㎝이다. 얼굴을 보면 수염이 검고 나이가 많지 않은 장년의 모습으로 서경우가 40대였던 광해군 대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낮은 오사모, 양쪽 바깥으로 벌어진 의자 손잡이, 단령 뒤에 삼각형 모양으로 튀어나온 무(武) 등에서 17세기 초엽 공신 초상화의 특징이 잘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