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경상북도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통일신라의 사리장엄구이다.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758년에 건립된 쌍탑이다. 1916년 갈항사지에 있던 두 석탑을 경복궁으로 옮기기 위해 해체했을 때 탑 기단부에서 각각 청동사리호, 금동사리병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2016년 7월 1일 보물로 지정되었고,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갈항사(葛項寺)는 승전법사(勝詮法師)가 창건한 화엄종 사찰이다. 동서 삼층석탑은 758년(신라 경덕왕 17)에 경주 영묘사(靈廟寺)의 언적법사(言寂法師)와 그의 두 누이가 함께 발원하여 만든 탑이다. 이러한 사실은 동탑의 상층 기단 면석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알 수 있다.
두 석탑은 1916년 서울 경복궁으로 옮기기 위해 해체했는데, 이 때 두 탑의 기단부에서 토기 항아리와 청동제 사리호, 금동제 사리병, 묵서 준제다라니 등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중에서 청동사리호 2점, 금동사리병 2점, 준제다라니 1점은 2016년 보물 제1904호로 지정되었다.
김천 갈항사지 동서 삼층석탑의 사리장엄구는 토기를 외호로 삼고 그 안에 청동사리호를 내호로 두었으며, 내호 안에 다시 금동사리병을 넣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발견 당시 금동사리병 안에 있던 부식된 종이 편은 최근 보존처리를 통해 준제다라니(准提陀羅尼)임이 밝혀졌다. 별도의 뚜껑이 있는 토제 외호는 표면에 인화문이 새겨진 녹유항아리로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그리고 동서탑의 청동사리호와 금동사리병 등 주요 사리장엄구는 국립대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동탑에서 발견된 뚜껑이 있는 청동사리호는 위와 아래 너비의 차이가 없이 몸체가 긴 항아리로, 바닥에는 바깥으로 벌어진 굽이 달려 있다. 사리호의 목에는 청동띠를 돌렸는데 이 띠는 뚜껑의 꼭지까지 연결되어 있다. 사리호 몸체에 뚜껑을 고정할 만한 장치가 없는 것으로 보아 뚜껑과 호에 연결된 청동띠를 이용하여 사리기를 밀봉한 것으로 추정된다.
서탑에서 발견된 청동사리호는 동탑의 사리호와 유사하지만 굽이 없고, 크기도 더 크게 제작되었다. 몸체의 윗면이 하부보다 넓게 제작되었으며, 뚜껑과 몸체 상단에 청동띠를 연결하는 고리를 따로 마련하여 고정하는 방식도 동탑 사리호와 차이가 있다. 청동사리호의 형태는 9세기 이후 뼈항아리로 많이 사용된 토제연결고리유개호와 밀접한 관련성을 보여 통일신라 토기 연구에도 중요한 비교 자료가 된다.
청동사리호 안에 들어있던 금동제 사리병은 긴 목에 타원형의 몸체로 성형된 병으로 바닥의 굽은 밖으로 벌어진 형태이다. 이러한 양식은 8세기 무렵 동아시아에서 성행했던 정병의 형태를 차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두 탑의 금동제 사리호는 크기와 기형이 유사하지만 동탑의 사리병은 긴 목에 7겹의 융기선을 두루고, 밖으로 벌어진 굽의 끝처리를 꽃잎처럼 표현하여 장식성에서 차이를 보인다.
사리장엄구의 제작 시기는 758년 석탑을 조성할 때 함께 봉안한 것으로 판단되지만, 외호로 사용된 녹유항아리는 원래 다른 용도로 제작된 토기를 일부 재가공하여 사리용기로 전용한 것으로 짐작된다.
김천 갈항사지 동 · 서 삼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석탑에 각자(刻字)된 명문을 통해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있어 통일신라 사리장엄구의 연구의 기준 자료가 된다.
청동사리호와 금동사리병은 당대 유행하던 형식을 반영하고 있으며, 특히 청동사리호의 경우 토기의 형식 전개와도 밀접한 관련을 보여 공예사적으로 귀중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그리고 준제다라니는 국내 발견 자료 가운데 범자가 사용된 최고의 사례로 통일신라 사리장엄 법식과 불교 신앙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