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Sankt Peterburg)의 우스펜스크에공동 묘지(Uspenskoe Kladbishche)로, 1911년 2월 3일에 나라를 잃은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자결한 이범진이 묻힌 곳이다.
1899년 3월 15일에 이범진은 러시아·프랑스·오스트리아 주재 전권공사로 임명되어, 이듬해 7월 4일에 프랑스 파리를 거쳐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하여 신임장을 제정하고는 업무를 시작하였다. 그 뒤 1901년 3월 12일에는 3국 공사의 겸직이 해제되고 러시아 상주 대한제국 공사로 임명되었으며, 파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 대한제국 공사관을 열고 업무를 보았다.
1904년 2월에 일제는 ‘한일의정서’의 체결을 강요하고서 이범진의 소환을 집요하게 요구하였다. 고종 황제는 5월 18일에 러시아 상주 공사관의 폐쇄와 함께 이범진을 소환하였고, 9월 1일에 이범진을 면직하였다. 하지만 이범진은 ‘일본의 압박에 의한 귀환 명령을 무시하고 러시아에 남아라’는 고종 황제의 밀서를 받고는 아들 이위종(李瑋鍾)과 함께 공사관이 문을 닫은 1906년 초까지 계속 활동하였다. 1910년에 ‘경술국치’를 당하자, 1911년 1월 13일에 노바야 데레브냐(Novaya Derevnya)의 체르노레첸스카야(Chernorechenskaya)거리 5번지에 자리한 별장의 2층에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 그는 고종 황제에게 보내는 유서에서 “구적(仇敵)을 보복할 수 없고, 자살 외에 취할 수 있는 어떤 수단도 없다”고 하면서 생을 마쳤다.
그의 유해는 2월 3일에 기차편으로 옮겨져 많은 조문객이 모인 가운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우스펜스크에공동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 뒤 1958년 2월에 레닌그라드소비에트는 우스펜스크에 공동 묘지를 새롭게 ‘북방 공동묘지’로만들려는 계획을 승인하였다. 특히 오래된 무덤은 방문객이 있는 무덤만 보존하기로 결정하면서, 대부분의 무덤은 없어졌고, 묘비는 물론 묘역의 지리적 명칭도 없어지고 말았다. 이범진의 무덤 역시 이 때에 훼손되어 그 위치를 알 수 없게 되었다. 다만그의 유해가 묻혔던 지점으로 추정되는 곳은 지금의 ‘북방 묘지’ 제8구역의 너비 40m, 길이 200m 정도 되는 곳이다. 이 구역의 입구에는 2007년 7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세운 이범진 순국비가 자리하고 있는데, 한글과 러시아어로 이범진의 생년월일과 순국일자, 순국장소 등을 써 놓았다. 반면에 묘역 관리사무소 옆에 있는 안내판에는 러시아어로 ‘리범진(Li Bom Dzhin) 1852~1911 한국 공사 왕자’라고 쓰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