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한응(李漢應)은 1874년 경기도 용인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고, 1889년 서울로 와서 최초의 근대학교라고 할 수 있는 육영공원(育英公園)에 입학하였다. 육영공원을 졸업한 후 1894년 과거에 응시(司馬試)하여 성균관 진사로 합격하였으나 부친 사망으로 3년상을 치러야만 했다. 1897년 한성부(漢城府) 주사(主事)로 관계(官界)에 나갔고, 2년 후인 1899년에 관립영어학교의 교관이 되었다.
대한제국정부는 민영돈(閔泳敦)을 주차영국 겸 주이탈리아 특명전권공사로 임명하였다. 대한제국정부는 대유럽 외교관계를 위해 최초로 민영돈을 영국과 이탈리아의 상주공사로 임명하여 파견하였다. 이한응도 1901년 3월 14일 3등 주영공사관 참서관으로 임명되어 민영돈 주영공사를 수행하여 영국 런던에 상주하게 되었다. 영국에 온 이한응은 주영공사 민영돈을 보좌하며 외교관으로 생활하고 있을 당시인 1902년 제1차 영일동맹이 체결되었다.
이한응은 1901년 주영국공사관 참서관으로 부임 이후 대한제국의 영토보전과 독립을 위해 영국정부를 상대로 치열한 구국외교를 펼쳤다. 이한응은 1904년 러시아와 일본 간에 한반도를 두고 전쟁이 벌어진 것을 예상하고, 전쟁 발발 이전부터 이를 방지하기 위한 ‘한반도 중립화 방안’을 제시하였다. 이한응의 구국 외교활동은 열강들의 각축에서 조국의 독립과 영토보존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주재하는 영국을 상대로 맹렬하게 외교활동을 펼쳤지만 그 한계에 부닥쳐 자결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1903년 11월 주영공사 민영돈과 벨기에공사 민영찬을 해임하고, 궁내부(宮內府) 특진관(特進官) 김승규(金承圭)를 영국에 주차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민영돈은 1904년 2월 외부협판 박영하(朴榮夏)에게 주영국 공사직을 넘겨준 후 귀국하고 말았다. 민영돈 주영공사가 해임된 이후 신임 주영공사는 부임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주영 한국공사관의 업무는 1904년 초부터 이한응이 대리공사(a chargé d´affaires)로서 업무를 수행할 수밖에 없었다. 대리공사란 특명전권공사가 비어 있을 때 또는 그 직무 수행이 불가능할 때 일시적으로 대리하는 공사를 말한다.
이한응 대리공사는 직책을 맡은 직후인 1904년 1월 13일 영국 외무성을 방문하여 한반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담은 장문의 메모와 함께 각서를 수교하였다. 그리고 2월 19일에는 그의 견해를 설명하는 메모를 추가로 보냈다. 이 메모에서 이한응 대리공사는 조만간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것이며, 전쟁의 결과와 상관없이 한국의 독립, 주권, 영토 및 특권 보존을 위한 새로운 보장을 해 줄 것을 영국정부에 요망하였다. 그리고 이한응 대리공사는 영국정부에 자신의 한반도 중립화안을 담은 메모를 수교하는 한편으로, 적극적으로 영국 외교부와 접촉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영국정부는 이한응의 요구와 같이 한국에게 새로운 보장을 줄 수 없음을 통보하였다. 이와 같이 이한응은 영국정부로부터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존을 위한 노력을 하였지만 영국의 지원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후 이한응이 예상한 바와 같이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한국이 전쟁터로 변하게 되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었던 열강 간의 치열한 쟁투라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도 이한응은 대리공사로서 영국정부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그는 러일전쟁이 발발한 후 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에 대한 전망이 점점 어려워져 간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한응 대리공사는 1904년 10월 영국 외무부를 방문하고 런던주재 한국공사 임명에 대해 협조를 부탁하였다. 이한응 대리공사가 영국 외무부를 상대로 계속해서 한국의 독립 보존을 요청하였다. 또한 1905년 3월 3일자로 영국 외무대신에게 대한제국정부를 위해 거중조종(good offices, 제삼자가 당사자 사이에서 분쟁과 같은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는 일)을 해달라고는 편지를 보냈다. 그러나 외교관으로서 한계를 절감하고 비통한 심정에서 이한응 공사는 1905년 5월 12일 런던에 있는 주영공사관에서 자결 순국을 하였던 것이다.
이한응 대리공사가 순국한 이후 영국 현지의 신문인 『데일리 텔리그라프(Daily Telegraph)』 1905년 5월 13일자의 「공사관의 비극(A Legation Tragedy)」이라는 신문기사에 의하면, 그가 순국장소는 주영한국대사관의 자신의 침실(his bed-room)라고 이한응의 시신은 창문 끈(window-cord)을 문 뒤의 핀(pog)에 걸어 목을 맨 채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이한응 대리공사가 순국한 장소는 런던시내의 얼스코트(Earl's Court) 트레버로드(Trebovir Road) 4번지 주영대한제국공사관 3층이다.
이한응이 순국한 주영대한제국공사관 건물은 현재에도 당시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지만, 물론 내부는 리모델링되어 주거지로 사용되고 있다. 외부의 모습은 110년 전과 거의 같다. 현재 「등기부」에는 트레버로드 2번지, 4번지, 6번지가 한 건물로 등기되어 있고, 건물의 소유주는 건물의 「등기부」에는 FAMILY MOSAIC HOUSING(Industrial and Provident Society No. IP30093R)으로 되어 있다. 한국공사관 건물은 지하층, 1층(ground), 2층(1st floor), 3층(2nd floor), 4층(3nd floor), 5층(4th floor) 6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지하는 주방, 하인실, 화장실이 있었다. 1층에는 식당, 거실이 있고, 2층에는 큰 거실과 서재가 있고, 3층에는 방이 2개 있으며 화장실과 옷장이 있다. 4층에는 방이 2개와 화장실이 있으며, 5층은 다락방으로 4개의 작은 방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