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1운동 이후 영국지역에도 한국의 독립문제와 관련하여 적지 않은 관심을 표명하는 일이 발생하였고, 한국의 사정을 널리 소개한 사람은 맥켄지(Frederick A. McKenzie, 1869~1931)였다. 그는 3·1운동이 발발하면서 영국사회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게 되었다. 맥켄지는 임시정부나 프랭크 스코필드(Frank. W. Schofield) 등 친한·반일적 선교사 등이 제공하는 자료를 바탕으로 『한국의 자유를 위한 투쟁(Korea's Fight for Freedom)』을 1920년에 발간하였다.
맥켄지의 이 책은 당시 영국사회에서 급속히 팽배하던 반일적인 분위기에 편승하여 영국의회내에서 극동문제를 논의하는 데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 책의 영향력에 힘입어 맥켄지는 ‘한국친우회’라는 단체를 조직되었는데 이는 매우 획기적인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한국친우회는 1920년 10월 26일 하원 의사당(House of Commons) 제6호 위원실에서 창립대회를 개최하였다. 창립대회 의장에는 로버트 뉴맨(Sir Robert Newman, Bart), 서기에는 윌리암스(W. Llew Williams)의 개회로 열렸는데, 국회 대의사가 17명, 에덴버그대학장 등 학자가 6명, 신문기자가 4명, 각 교회 목사가 9명, 귀족이 3명, 기타 유력한 신사가 62인 출석하였다. 의장 뉴맨은 개회사에서 “본회는 정의와 자유를 위하여 분투하는 한국을 위하여 찬조할 목적으로 개회”한다고 하였고, 시베리아 출정군사령관으로 있던 육군정령 존 워드(John Ward)가 기초한 4개 조항의 의결안은 존 클리포드(John Clifford)의 낭독으로 만장일치 통과시켰다. 이같은 의결안에 대해 대의사 육군부령 패리(T. H. Parry)는 “우리가 다만 이 의안 통과뿐으로 유익이 무하니 각각 돌아가 노력하자”고 하였고, 대의사 라일 사무엘(Lyle Samuel)은 영국이 일본과 같이 비열한 국가와 동맹국이 되었는지 나는 그 이유를 발견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우리는 국무총리에게 한국사정을 반포하기를 요구하자”고 하였다. 맥켄지는 한국친우회 창립대회에서 “나는 한국인의 자유 및 정의를 위해 ‘친우회’라는 것을 조직함으로써 그들의 어려움(境地)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본회를 설립한 것은 감히 정치상의 목적에 나온 것이 아니고, 또 반일본적 정신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직 금일 조선에 있어 사태는 인도상(人道上) 및 애국적(愛國的) 의무관념상(義務觀念上) 우리들이 묵시(黙視)할 수 없는 바이다. 오직 일본의 조선에 대한 근본적 오류는 그 동화정책에 있고, 저들이 한국인의 자유를 파괴시키려고 기도하고 있다. ..… 일본정부로 하여금 폭학(暴虐)한 대한 정책을 개선시키기 위해 일치 노력을 보일 것을 절실히 바랍니다”라고 연설하였다.
이같은 맥켄지의 연설에 대해 참석자들은 일본정부의 압박을 받는 한국에 대해 깊은 동정을 표하였고, 노예적 지위에 있는 한국민의 자유를 회복시키는 것이 영국인의 전통적 정신이라고 고창하였다. 창립대회 이후 영국 한국친우회는 회장에 로버트 뉴맨 바트, 서기에 윌리암스, 회계는 하이슬로프(Walter G. Hislop), 간사에는 맥켄지, 집행위원 6명을 선출하였다. 한국친우회의 주요 구성원들은 극동무역과 관련되어 있거나 3·1운동 당시 박해의 대상이었던 기독교 관련 종교단체, 반일적 지식인 등이며 당시 영국사회에 팽배한 반일적 분위기를 대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맨체스터 가디언(The Manchester Guardian)』지에 의하면, 힌즈(John Hinds)·패리(Tom Parry) 대령, 톰린(Hugh E. Tomlyn) 소령 등 약 30명의 의원과 교수 6명, 기자 4명, 목사, 상원의원 3명 등 60여명의 유력인사들이 한국친우회에 가입하였다고 한다.
영국사회에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반일·친한단체의 출현에 힘입어 파리위원부의 서기인 황기환은 유럽에서 독립운동의 중심지를 일시적으로 파리에서 런던으로 옮기게 된다. 맥켄지는 한국친우회 창립대회에 참석한 황기환을 유럽에서 공적으로 한국인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영국의 한국친우회는 맥켄지의 활발한 활동과 더불어 회장을 맡고 있는 로버트 뉴맨 바트 경은 1920년 일제가 간도에서 한인에 대한 대량 학살사건, 즉 ‘경신대참변’을 일으키고 있을 무렵 영국의 외무차관인 세실 함스워드(Cecil Harmsworth)에게 정식으로 “영국정부는 한국 국경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만행을 보고받았습니까? 질서를 유지하기 위하여 만주에 파견된 1만 5천명의 일본군이 교회를 불태우고, 마을을 파괴하고 기독교인을 학대한 것은 사실입니까? 영국정부는 만주에서의 일본의 절대권을 인정합니까? 영국정부는 만주와 몽고를 지배하려는 일본의 정책을 지지합니까”라고 질문하였다.
위와 같이 영국의회의 의원이기도 한 뉴맨 바트 회장은 간도에서 일제에 의한 한국인 대량 학살에 대해 영국정부가 일정한 조처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또한 영국의 한국친우회에서는 그 활동을 위해 기금을 모집하였고, 설립 초기에 「아시아의 독일인」, 「일본인의 조선에 있어 죄상」, 「조선에 있어 공포정치에 관한 물어(物語)」, 「미국상원에 있어 조선문제 논의의 모양」, 「조선인은 공평하게 생각하는가」 등의 인쇄물을 무상으로 배부하였다.
그러나 영국의 한국친우회는 그후 자금문제 등으로 특별한 활동을 진행할 수가 없었고, 1925년경에는 맥켄지와 윌리암스외에 다른 사람들은 활동이 중지된 상태였다. 맥켄지는 워싱턴회의가 개최되기 전에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에서 “워싱턴회의는 조선이 영구히 일본이 일부분이라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고로 장래는 일일이 일본제국에 의뢰하여 그 양해에 의해 前途를 결정될 수밖에 없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기도 하였다.
영국에서 한국친우회의 활동이 저조하면서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관심은 퇴조하였고, 연합국의 승리가 확실시되던 1944년 후반 영국은 미국의 한국문제에 대한 의견 교환을 요청해 오자 역사학자인 토인비(Arnold J. Toynbee)를 위원장으로 한 한국위원회(Korea Committee)를 구성하였다. 이 위원회에는 버틀러경(Sir Paul Butler), 허드슨(G. F. Hurdson), 존스(F. B. Jones), 맥래(Macrae), 웹스터 교수(Prof. Webster)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1945년 초까지 「한국의 장래(Future of Korea)」를 비롯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