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당시에 500여 명의 한인이 연합국의 지휘를 받으면서 북극해의 전략 요충지인 러시아의 항구도시 무르만스크(Murmansk)에서 일하였다. 1919년 10월 4일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파리에 설치한 파리위원부(巴里委員部)는 이들을 구제하고자 프랑스 노동부와 교섭하였다.
10월 15일에 무르만스크에서 철수하던 영국은 이들 가운데 1차로 200명을 에든버러(Edinburgh)로 이주시켰다. 파리위원부의 서기장 황기환(黃玘煥, ?∼1923)은 영국으로 급히 들어가 한인들을 만나 프랑스로 데려가려 했지만, 프랑스 외무부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그 뒤 200명의 한인 가운데 대부분은 동방으로 보내졌고, 11월 19일에 불과 35명만이 파리에 도착하였다.
프랑스로 들어온 한인들은 프랑스 노동부에 의해서 바로 마른도(Marne道)의 쉬이프촌(村)에서 전지(戰地)를 수선하는 공사에 투입되었다. 이들은 점차 이곳에 정착하여 한인 마을을 이루고 프랑스 최초의 한인 단체인 재법한국민회를 결성하였다.
이 단체는 홍재하(洪在廈, 1892~1960)를 대표로 선출하고, 하루하루 노동으로 먹고사는 어려운 환경에서도 파리위원부를 후원하였다.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문호리 출신인 홍재하는 1913년부터 만주·노령을 거쳐 프랑스에 들어와 활동하면서 파리위원부,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적지 않은 재정적 기여를 하였다. 1920년 10월 31일에 재법한국민회는 총회의의 명의로 한국민국제연맹개진회(韓國民國際聯盟改進會)라는 단체를 새로 만들기도 하였다.
1921년 12월경에 파리에 거주하던 50~60명의 한인들은 대부분 전기수리공이나 공장 및 가내 노동자로 활동하였고, 일부만이 어학을 준비하거나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그 뒤 영국에 머물던 한인 10여 명이 프랑스에 들어왔는데, 이들은 일솜씨가 숙련되었고 품행이 선량하여 곳곳에서 환영을 받았을 정도로 프랑스 한인과는 달랐다. 1925년경에 프랑스에는 한인 150명이 살았는데, 약 100명은 유학생이었고 약 50명은 노동자였다. 몇 년 만에 노동자의 수는 줄고 유학생의 수는 늘었다.
다만 1921년 7월에 황기환이 미국으로 떠난 뒤에 유럽에서 한인의 외교 활동은 이어지지 못하였다. 이 때 홍재하는 파리위원부를 유지하려고 미국 워싱턴의 구미위원부(歐美委員部)에 편지를 보냈고, 재법한국민회 회원에게 독립운동 자금을 여러 차례 거두어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하였다. 그는1945년 광복 이후에도 파리에서 열린 제3차 UN총회에서 한국 대표인 장면, 조병옥, 김활란 등을 도왔고, 1949년에 대한민국 공관이 파리에 설치될 때에도 크게 기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