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일 일본에서 이른바 ‘관동대지진(關東大地震)’이 발생하였다. 관동대지진은 9월 1일 오전 11시 58분에 도쿄(東京), 요코하마(橫濱)를 시작으로 주변 각지를 덮치는 커다란 재해였다. 그런데 일본인들이 한국인에 대한 대학살은 지진이 발생한 다음날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폭탄을 소지하고, 방화를 하고, 우물에 독극물을 집어던지고 있다”라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이 근거없는 유언비어는 무고하게 한국인을 집단학살을 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제의 군경과 자위단이 한국인을 찾아서 학살을 자행하였던 것이다. 일제는 대지진 피해 대책이 미진하여 여론이 험악해지고 이에 대한 불만이 곧 민중폭동으로 이어질 것에 겁을 먹었고, 이같은 불만을 돌리기 위한 돌파구로 무고한 한국인을 학살하였던 것이다.
일본인들이 한국인들을 집단 학살하였다는 사실은 독일인으로 동양미술을 전공한 부르크하르트 박사가 『보시쉐 자이퉁(Vossiche Zeitung)』 1923년 10월 9일자에 「한인에 대한 대량학살」이라는 제목으로 게재하였던 것이다. 그는 1923년 9월 1일부터 8일까지 일본에 체류하고 있을 때 관동대지진가 발생하였으며, 이때 한인들이 일본인들에게 참상을 당하는 현장을 보았던 것이다. 부르크하르트 박사가 쓴 기사를 본 재독 한인들을 크게 분노하였고, 유덕고려학우회(留德高麗學友會)에서는 10월 12일 ‘한인학살’과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을 전단을 제작하여 유럽과 미주, 상해 임시정부에 배포하였다. 이를 통해 재독한인들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항일의지를 대외에 알렸다.
유덕고려학우회에서는 한인들의 피해를 조사하기 위해 그해 10월 18일 고일청과 황진남을 부르크하르트 박사와 면담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10월 26일 독일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독일에 있는 한인들의 위대한 회의(Great Meeting of Koreans in Germany)」라고 일컬어지는 ‘재독한인대회’를 개최하였던 것이다. 이 대회는 일제가 관동대진재 때 저지른 만행을 세계 각국에 널리 알릴 목적으로 개최되었는데, 관동대지진 발생 시 일제의 만행으로 당한 한인들의 억울한 죽음과 일제의 가혹한 식민통치를 규탄하였다. 그리고 재독한인들은 독일어 전단지 5천부, 영어 전단지 2천부를 인쇄하여 해외 한인사회와 각국 정부와 기관 등에 배포하였다. 유덕고려학우회가 재독한인대회에서 배포한 독일어 전단지는 「한국에서 일본의 유혈통치(Japanische Blutherrschaft in Korea)」이고, 영문으로는 「Japan`s Bloody Rule in Korea」이다. 이 선전문은 영문과 독문으로 만들어 각국의 주요 정부와 국민들에게 배포하기 위해 특별히 제작된 것이었다.
재독한인대회에서 배포한 선전문에는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의 지도가 크게 그려져 있다. 선전문의 내용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부분은 오랜 역사를 가진 한국의 독립된 역사 전통과 이를 침해한 일제의 침략과 식민통치, 3·1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 사실 등을 적고 있다. 두 번째 부분은 관동대지진 때 일제가 저질른 참상을 기록하고 있다. 마지막 부분은 한국독립의 열망을 밝히고 독립을 위한 한인들의 투쟁을 각국의 정부와 국민들이 적극 지지해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 대회에서 재독 한인들은 일제의 한국지배를 비난하고 독립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재독한인대회에서 배포한 선전문에는 세 명의 한인 서명자가 있다. 이중 확인된 인물로는 이극로(Li Kolu)와 김준연(C. Y. Kim)·고일청(Jh Tsing Kao)이다. 또한 유덕고려학우회는 영어와 독일어 선전문 외에도 한문으로 번역한 「통고문(痛告文)」도 제작해 구미 각지에 재류하는 중국인들에게 보냈다.
관동대지진 때 일제의 한국인 학살을 전 세계에 알린 이극로는 1924년 2월 베를린 소재 지텐벨트(Siettenfeld)에서 『Unabhä̈ngigkeitsbewegung Koreas und Japanische Eroberungspolitik(『한국의 독립운동과 일본의 침략정책』)』 이라는 소책자를 출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