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6년(숙종 32)에 문혜공(文惠公)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서원이다. 현재 서원터는 민묘(民墓)가 조성되고 밭으로 개간되어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만 건축물의 초석으로 보이는 석재가 간간히 흩어져 있다.
1706년에 향중 유림들이 이안눌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향현사(鄕賢祠)를 건립하고 제향하였다. 향현사가 동악서원으로 개칭되는 과정은 알 수 없지만, 1868년(고종 5)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이후 다시 복설되지 못하였다.
이안눌은 예조판서와 충청도순찰사를 지냈으며 선조대에 활동한 석주(石洲) 권필(權韠, 1569∼1612)과 쌍벽을 이루는 시인으로 이백(李白)에 비유되기도 했다. 정철(鄭澈)의 제자로 동년배인 권필, 선배인 윤근수(尹根壽, 1537∼1616), 이호민(李好閔, 1553∼1634) 등과 동악시단(東岳詩壇)이란 모임을 결성하여 활동하기도 했다.
당진시 정미면 사관리에는 이안눌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데, 동악서원도 그의 묘소가 있는 당진시에 세워진 서원이었다. 신도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宋浚吉), 전액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김상헌은 이안눌의 신도비에서 조선조 중엽 이상은 논할 것이 없고 선조대에 시가 가장 성행하였으나 여러 명가를 두루 손꼽아보아도 이안눌의 위에 있는 사람이 드물다고 평하였다.
선조대 시의 명장으로 꼽히는 이안눌을 배향한 대표적인 서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