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주서원 ()

창주서원 묘정비
창주서원 묘정비
유적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조헌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에 있었던 조선후기 조헌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한 서원.
개설

창주서원은 1608년(선조 41)에 사액을 받은 표충사(表忠祠)에서 출발한다. 표충사는 이곳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금산 전투에서 순절한 조헌(趙憲, 1544∼1592)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682년(숙종 8)에 창주서원으로 재사액을 받고 김집(金集, 1574∼1656) · 송시열(宋時烈, 1607∼1689) · 송준길(宋浚吉, 1606∼1672) · 곽은(郭垠)을 추가로 배향하였다. 지금은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

역사적 변천

처음에는 표충사로 안내면 도리리에 창건되었다. 1624년(인조 24)에 이원면 원동리에 재건되었다. 1657년(효종 8)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고, 1682년에 창주서원으로 개칭되었다. 1710년(숙종 36)에 별사를 건립하여 곽은을 추가로 봉향하였다. 1864년(고종 1)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내용

조헌은 본관이 배천(白川)이고 자는 여식(汝式)이며 호는 중봉(重峯) · 도원(陶原) · 후율(後栗)이다. 이이(李珥, 1536∼1584) · 성혼(成渾, 1535∼1598)의 문인이다. 현재 남아있는 창주서원 묘정비는 1689년(숙종 15)에 만들어졌으나 1697년(숙종 23)에 청나라 황제의 사액(賜額)을 받게 되자 그간의 내력을 추기(追記)하여 이 비를 세우게 되었다. 송시열이 짓고 김수증(金壽增, 1624∼1701)이 썼는데, 추기한 사람은 미상이다.

비는 장방형(長方形)의 기초석(基礎石) 위에 비신(碑身)을 세웠으며 비신 위에는 기와지붕 모양의 비갓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올려놓았다. 1996년 1월 5일에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의병장 조헌을 배향하는 대표적인 서원의 하나이다.

참고문헌

『유교대사전』(유교사전편찬위원회, 1990)
『한국금석문대계: 충청남북도편』(원광대학교출판국, 1981)
국가유산청(www.khs.go.kr)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people.aks.ac.kr)
관련 미디어 (2)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