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 돌을 이용하여 묘역을 조성한 묘역식고인돌[墓域式支石墓]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묘역식고인돌은 용담식고인돌[龍潭式支石墓]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덮개돌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고인돌이라는 용어를 일괄적으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견해도 있다. 묘역식고인돌 이외에 무덤 주위를 도랑(溝)으로 굴착하여 구획한 무덤의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이러한 무덤을 주구묘(周溝墓)라고 하는데 이 또한 구획묘의 범주에 포함된다.
대체로 청동기시대 전기말에 발생하였으며 중기(송국리문화단계)에 크게 유행하였다. 따라서 중심시기는 청동기시대 중기라고 할 수 있다. 후기가 되면 중국 동북지방의 영향으로 새로운 묘제가 유입되어 기존의 무덤은 점차 사라진다. 하지만 일부의 구획묘는 후기까지 이어진다는 견해도 있다.
구획묘의 평면형태는 당시의 주거형태를 모방한 것이다. 대부분 세장방형, 장방형, 원형이 대부분인데 원형은 주거형태와 마찬가지로 후기에만 확인된다. 가장 이른 시기의 구획묘는 전북특별자치도 진안Ⅱ 안자동 1호 고인돌, 진안Ⅲ 안자동 9호 고인돌, 경상남도 합천 저포리 E8호 고인돌 등이다. 전기의 표지적인 유물인 이단병식석검이나 이른 시기의 적색마연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묘역식고인돌은 무덤방과 묘역의 내부를 축조하는 방법이 다양하다. 묘역의 내부를 채우는 방법에 따라 부석식(敷石式), 석축식(石築式), 즙석식(葺石式)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부석식은 묘역의 내부를 돌을 이용해 채우는 방법으로 가장 일반적인 형태이다. 충청남도 보령 평라리, 전북특별자치도 진안 여의곡, 안자동, 전라남도 여수 월내동, 경상남도 사천 이금동, 진주 평거동, 마산 진동리, 창원 덕천리, 김해 율하리・구산동유적 등 남부지역 송국리문화 분포지역 각지에서 확인된다.
석축식은 묘역의 경계를 따라 돌을 쌓고 내부에 흙을 채워 넣은 형태를 말한다. 경남 창원 덕천리유적 1호묘가 대표적이다. 이런 형태 중에는 묘역의 외곽을 따라 돌을 배치하고 내부는 생토면으로 비워두는 예도 있는데 내부에 흙을 쌓았는지 여부가 불분명하다.
즙석식은 묘역 내부에 흙을 채워 넣고 그 위에 돌로써 즙석한 형태를 말한다. 경남 마산 진동리유적 A-1호묘가 대표적이다. 진동리유적 A-1호묘는 묘역 외곽에 주구를 굴착하고 그 내부에 흙을 쌓은 후 무덤방을 조성하고 주구쪽을 돌로써 즙석하였다.
주구묘 역시 구획의 모양이 당시의 주거형태를 띠고 있다. 비교적 이른 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진주 대평리 옥방 8지구의 주구묘는 주구의 형태가 세장방형이며 내부에서 무덤방 2기가 확인되었다. 청동기시대 전기의 세장방형주거지의 형태를 모방한 것이다. 전기 주거지 내부에 설치된 복수의 노지는 주구묘 묘역 내부에 축조된 2기의 무덤방에 대응된다고 할 수 있다.
주구묘가 가장 많이 조사된 유적은 강원도 춘천 천전리유적이다. 천전리유적에서는 16기의 주구묘가 조사되었는데 가장 규모가 큰 6호는 주구의 길이가 42.6m에 이를 정도로 대형이다. 이외에도 강원도 홍천 철정리, 충남 서천 오석리 오석산, 경북 포항 호동, 울산 동천리・중산동 약수, 경남 마산 신촌리유적 등에서 주구묘가 조사되었다. 묘역식고인돌의 무덤방은 돌널무덤이 대부분인데 주구묘의 무덤방은 돌널무덤과 함께 움무덤도 확인된다. 울산을 비롯한 동남해안지역에 분포하는 주구묘의 무덤방이 주로 움무덤이다.
당시의 주거형태와 동일하게 묘역을 조성하는 것은 사후에 지위가 유지되면서도 신성한 공간을 일반 공간과 분리시키는 역할을 의도하기 위한 것이다. 청동기시대에 구획묘가 유행하는 시기는 농경이 확산되는 시기이며 이때에는 대규모의 취락이 등장하고 무덤이 군집화하며 환호축조가 유행한다. 이러한 변화는 사회가 점차 계층화되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 축조되는 구획묘는 수장(首長)의 등장을 증명하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