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박물관에서 2003년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모두 16기의 유구 윤곽선을 확인하고 그 중 1기의 유구에 대해 내부조사를 실시하였다. 트렌치와 내부조사한 유구에서 삼족기 등 모두 1,587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이에 2004년 경기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그 후 유적의 정비복원을 위해 중앙문화재연구원(현, 중앙문화유산연구원)에서 2012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2003년 성토부로 보고된 것이 한성백제시기의 토성이었음이 확인되었고 이와 관련된 수혈과 주혈군, 구상유구(溝狀遺構) 등 18기가 조사되었다. 유물은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 등 78점이 출토되었다.
유적은 한강과 지천이 합류하는 한강의 북안에 위치한다. 서해와 한강의 교통로에 해당된다. 주변에 반경 4~5㎞의 평야가 펼쳐져 있고 그 가운데 솟은 해발 27m의 표주박형 단독구릉이기 때문에 조망권이 뛰어난 곳이다. 풍납토성, 충주 탄금대토성과 같은 강안성(江岸城)이다.
토성은 구릉 정상부에 축조되었다. 정상부의 서쪽 외연을 따라 조성되었는데 서남쪽 일부만 성벽이 잔존해 있고 대부분 기저부만 확인되었다. 회색점토층의 범위가 정상부의 동쪽 외연과 남쪽 능선에도 분포하는 것을 감안하면 성벽은 정상부 전체를 둘러싸고 있었을 것이다. 토성의 평면형태는 타원형이며 전체둘레는 300m로 추정된다.
네 개의 트렌치를 설치해 토층조사를 실시하였다. 토층 단면을 통해서 볼 때 기저부 굴착→기저부 정지→하부성토→재굴착→상부성토 순으로 축조한 것을 알 수 있다. 트렌치별로 축조 양상이 조금씩 차이가 있는데 지형에 따라 축조기법을 달리 하였기 때문이다. 성토는 중심부의 경우 회색점질토를 이용하였고 양 측면은 암갈색점질토와 풍화암반토가 주로 사용되었다. 단면에서 확인되는 세로방향의 토층은 횡장판과 목주흔으로 추정되었다. 토층에서 볼 때 판축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축조기법은 암반층을 정리한 후 그 위에 성토기법으로 축조하였다는 점에서 화성 길성리토성, 증평 이성산성, 충주 탄금대토성과 유사하다.
토성의 규모가 작고 내부에 소수의 수혈유구가 확인되는 것으로 볼 때 소규모의 인원이 상주했을 것이다. 남동쪽으로 36㎞ 떨어진 곳에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위치하는 것으로 볼 때 군사적인 목적 혹은 한강을 이용한 물류 유통을 담당하던 성이었을 것이다. 내부의 수혈유구 출토품 등을 통해서 볼 때 상한은 4세기 중반 전후라고 할 수 있다.
수혈유구는 14기가 조사되었다. 평면형태는 원형, 말각방형, 타원형 등 다양하다. 2호와 3호 수혈은 평면형태는 원형이고 단면형태는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플라스크형이다. 내부에서 다양한 토기가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저장공으로 추정된다. 8호 수혈은 2003년도 조사에서 1호 주거지로 명명된 유구인데 주거지가 아닌 것으로 확인되었다. 평면형태가 타원형에 가깝고 벽면은 경사지게 굴착되었고 바닥은 오목하게 굴착한 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바닥 가장자리를 따라 주혈이 굴착되어 있었다. 주혈을 이용해 기둥을 세웠다는 것은 천정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기 때문에 저장공으로 이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삼족기, 장란형토기 등 대표적인 기종들은 대부분 풍납토성, 몽촌토성을 비롯한 백제의 중앙양식이다. 한성백제기에 풍납토성과 멱절동유적이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음을 알 수 있다. 또 토기를 훼기하는 제의 행위와 관련된 타격기와 숫돌이 출토되는 것으로 볼 때 물류집산지로서의 제의행위가 있었던 것을 추정할 수 있다.
고양멱절산유적은 백제의 중심지에서 중국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군사적 요충지이며 교역과 관련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유적 내에서 출토된 다종다양한 유물은 당시 활발한 경제활동의 중심지였음을 알려준다. 향후 백제의 대외진출과 교류, 군사활동 등에 대한 단서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