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화정동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울산광역시 동구 화정동 일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집터 · 수혈유구 등이 발굴된 마을터. 취락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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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울산광역시 동구 화정동 일대에 있는 청동기시대 집터 · 수혈유구 등이 발굴된 마을터. 취락유적.
개설

울산광역시 교육청에서 학교건립을 계획하면서 1999년부터 2000년까지 울산대학교 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그 후 남쪽에 인접한 화정동 209번지 일대에 다시 학교 건립을 계획하면서 2001년부터 2002년까지 울산문화재연구원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두 곳 모두 보고서명은 울산 화정동유적으로 명명되었다. 울산대학교 조사구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9기가 조사되었고 울산문화재연구원 조사구역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5기, 수혈(竪穴) 1기, 구(溝) 1기, 논, 조선시대 수혈 5기, 구 1기가 조사되었다.

내용

양쪽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주거지 14기는 모두 평면형태가 방형 혹은 장방형이며 내부에 주혈, 벽구(壁溝), 노지(爐址)가 설치되어 있다, 주혈은 대부분 4주식이나 6주식이다. 노지는 14호 주거지만 2개가 설치되었고 대부분 1개씩 설치되었는데 바닥을 얕게 굴착한 토광식이다. 화정동유적에서조사된 주거지는 포항, 경주, 울산지역에서 청동기시대에 일반적으로 확인되는 전형적인 ‘울산식주거지’이다. 주거지에서는 ‘검단리식토기’ 라고 하는 낟알문이 새겨진 심발형토기, 호형토기, 합인석부(蛤刃石斧)를 비롯한 석부류, 일단경식석촉, 어망추 등이 출토되었다. 울산의 다른 청동기시대 유적에 비해 어망추의 출토량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화정동유적은 해안가에 가까운데 생업활동 중 어로의 비율이 높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논은 발굴구역 전면에 조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후대의 개간 등으로 일부만 남아 있다. 발굴은 논의 상면이 비교적 양호한 지점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논의 형태는 계단식으로 울산 야음동·신천동 냉천·화봉동유적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논과 동일한 형태이다. 이러한 계단식논은 청동기시대에 울산지역에서만 조성되는 특이한 형태이다. 울산지역은 큰 하천이 없고 강 폭이 좁아 충적지가 발달하지 못했는데 그러한 지형적인 원인으로 계곡부나 구릉 사면의 경사면을 개간하여 논을 조성하였기 때문에 논면의 폭이 좁은 계단식 논이 성행하였다고 한다. 청동기시대에는 계단식 논 이외에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구획된 바둑판식 논이 조성되었는데 울산지역에서 바둑판식 논은 야음동 옥현·서부리 남천·굴화리 생기들유적 등에서 조사된 예가 있다.

화정동유적의 논이 울산지역의 다른 계단식논과 차이가 있다면 논 한면의 면적이 상대적으로 좁다는 점이다. 논 한면의 폭은 유사하기 때문에 길이가 다른 계단식논에 비해 짧다는 것이다. 조사된 논면은 총 23면이다. 한 면의 길이는 50410㎝, 폭은 3070㎝, 단차는 2~6㎝이다. 단차가 낮은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토압에 의해 압착되었기 때문이며 청동기시대에 논이 조성될 당시에는 더 높았을 것이다. 논면에서는 무문토기가 파편으로 출토되었다.

구는 1기가 조사되었는데 잔존하는 길이가 500㎝, 폭 110㎝, 최대 깊이 15㎝이다. 내부에 다량의 소토와 무문토기 파편, 소량의 어망추와 할석, 석기 등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에 토기를 소성하는 가마일 가능성이 있다. 유사한 형태의 가마가 진주 대평리 옥방 1지구에서 조사된 사례가 있다.

이 외에도 조선시대 수혈 5기가 조사되었다. 평면형태는 타원형에 가깝다. 정확한 성격을 알 수 없다.

의의와 평가

울산화정동유적은 청동기시대 주거지와 함께 당시 쌀농사를 지었던 논이 함께 조사되었다. 구릉 사면을 계단식으로 개간한 형태이다. 청동기시대에 송국리문화 분포권에 비해서는 논의 규모가 작지만 울산지역에서도 여러 유적에서 논이 조사되었기 때문에 쌀농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 다운동유적의 청동기시대 주거지에서는 탄화미가 출토된 사례가 있다. 울산지역의 청동기시대 경작유구 연구에 좋은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또 주거지에서 출토된 다량의 어망추를 통해 당시에 어로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농경과 포획, 어로가 동시에 이루어졌을 것이다.

참고문헌

『울산화정동유적』(울산문화재연구원, 2003)
『울산 연암동유적 부록: 울산 화정동유적』(울산대학교박물관, 2001)
집필자
이수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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