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성의 존재가 알려져 오다가 공사현장 단애면에서 토기편이 확인되어 호암미술관에서 산 42-2번지 일대를 발굴조사 하였다. 주거지 1동, 고상가옥의 주혈, 소형 수혈, 유물포함층, 토성의 단면조사가 이루어졌다.
주거지는 아래쪽이 유실되었다. 평면형태는 타원형으로 추정된다. 규모는 길이 620㎝, 폭은 잔존 200㎝이며 깊이는 88㎝이다. 남쪽에 돌출된 부분이 출입구로 추정된다. 내부에 주주혈 8개가 설치되었고 벽을 따라 작은 소주혈이 설치되었다. 바닥은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나 일부는 흙을 깔아 다졌다. 내부에서 타날문단경호, 연질옹, 파수부발, 철겸, 방추차 등이 출토되었다. 주거지의 시기는 출토된 유물과 구조를 통해서 볼 때 4세기 중엽에서 5세기대에 해당된다.
토성은 단애면과 트렌치를 통해 일부만 조사되었다. 토층 하면에서 생활면과 일부 유구가 확인되었다. 토성이 축조된 효양산은 북쪽이 급경사를 이루는데 토성은 이런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축조한 산복식(山腹式)이다. 외면은 절개하여 급경사를 만들고 너비 35m, 높이 13m로 성토하여 판축의 토루를 만들었다. 토루는 황갈색의 풍화암반토와 갈색부식토를 교대로 다져 쌓았는데 축조상태로 볼 때 급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토성은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에 중요한 역할을 한 전진기지 즉 신라의 산성으로 보고되었다. 하지만 산성에서 채집된 기와는 장판의 타날판에 의해 횡방향으로 사격자문을 타날한 것인데 9세기 이후에 제작된 것이다. 따라서 효양산 토성은 통일신라시대나 고려시대에 일시적인 전란에 대비하여 급조된 성일 가능성이 높다.
발굴조사를 통해 신라토성으로 알려진 효양산토성이 남북국시대 혹은 고려시대에 축조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토성 하면에서 확인된 주거지와 수혈 등의 생활유적을 통해 백제사 연구에 좋은 생활자료를 확보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