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천성동리유적은 토사채취로 인해 노출된 유적을 보호하기 위해 경기도박물관에서 1998년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유적은 영평천이 크게 곡류하는 안쪽의 비옥한 충적대지에 위치한다. 주거지 9기와 수혈(竪穴) 45기, 구상유구(溝狀遺構) 1기가 조사되었다.
출토유물을 통해 원삼국시대-한성백제기-신라의 세력이 파급된 시기로 분류하였다. 원삼국시대 유구는 6호 주거지 1기이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방형이며 내부에서 연질타날문토기와 함께 중도식무문토기 동체편이 출토되었다.
한성백제기의 유구는 4기의 주거지(1호・4호・7호・9호)와 12기의 수혈유구, 구상유구 1기이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말각방형에 가까운 타원형인데 규모가 길이 3.9~5.5m 정도의 소형이다. 바닥 중앙부는 비교적 단단하게 처리되어 있는데 의도적으로 다졌는지는 알 수 없다. 9호 주거지에서는 부뚜막 시설과 출입구가 확인되었다. 부뚜막은 점토로 만들어졌다. 출입구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외부로 약간 돌출된 형태이다. 중심연대는 중도식무문토기가 소멸된 점, 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와 장란형토기(長卵形土器)가 자비용기(煮沸用器)로 정착되고 새로운 주거지가 채용되는 점 등을 고려할 때 3세기 중반 무렵으로 추정된다.
신라의 세력이 영향을 미친 시기의 주거지는 2기(3호・5호)이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말각방형이며 규모는 한변의 길이가 3m 정도로 소형이다. 3호 주거지에는 부뚜막이 설치되었다. 이 시기의 중심연대는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시기를 감안하면 6세기 중반이 상한연대이지만 출토된 토기를 통해서 볼 때 중심연대는 6세기 후반이며 하한은 7세기 이후로 내려가지 않는다.
포천성동리유적은 한성백제의 성립 과정을 밝힐 수 있는 마을유적일 뿐만 아니라 한강유역 이북에서 처음으로 조사된 신라의 마을유적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신라의 영토전쟁 과정에서 사민정책이 강력하게 시행되어 점령 지역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였던 사실을 입증하는 의미있는 고고학자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