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동천동 도시 유적 ( )

선사문화
유적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도시터. 도시유적.
정의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도시터. 도시유적.
개설

1997년 11월 1일부터 1999년 3월 10일까지 3차에 걸쳐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과 경주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발굴조사되었다. 조사 결과 신라시대 도로, 우물, 수혈(竪穴), 청동공방지 등 101기와 조선시대 구(溝), 우물, 삼가마 6기 등 총 107기가 조사되었다. 주요 출토유물은 벼루, 인화문토기, 청동합(靑銅盒), 용범(鎔范), 청동제 완·용기(容器), 납석제, 세발다리 솥, 토제 주전자, 장경병(長頸甁), 명문(銘文)기와, 도가니, 대부편부병(臺附偏球甁), 막새, 토제범(土製范), 다면체수정(多面體水晶), 단각고배(短角高杯), 등잔과 백자(白磁), 분청사기, 시유도기(施釉陶器) 등이다.

역사적 변천

신라의 왕경(王京)은 월성과 황룡사 부근을 시작으로 점차 외곽을 향하여 확장한다. 동천동유적도 7세기 중반경에 동서도로가 먼저 조성되고,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경에 교차지점까지 진행되고 계속해서 남북도로가 축조되었다. 도로축조 당시 우물, 청동공방지, 건물지 관련 유구(遺構)들이 함께 조성되었다. 도로는 내부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볼 때, 9세기까지 사용되었으며, 왕경도로가 주요 도로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폐기된 이후에는 다수의 건물지와 담장지 등의 생활유구가 빠른 시간 내에 넓은 범위로 조성되었다.

내용

경주동천동도시유적은 북천(北川)의 북쪽 소금강산(小金剛山) 아래에 있으며, 1997년부터 1999년까지 경주 도심의 팽창에 따른 대규모 택지개발에 의한 구제발굴조사(救濟發掘調査)로 알려졌다. 기와 및 토기의 연구성과를 통해 볼 때, 2단계로 구분이 가능하다. 1단계의 유구로는 동-서도로 1의 최하층도로, 수혈12·49·55호, 건물지 2호의 기단석열(基壇石列), 청동공방지, 건물지 1호 등이다. 2단계의 유구는 동-서도로 1내의 최하층도로 위에서 확인된 담장석열, 문지시설, 배수시설 1∼5호, 우믈 10·14호 등이다.

1단계는 7세기 후반경이며, 2단계는 통일신라 말 무렵으로 판단된다. 도로는 동-서방향의 도로 2곳, 남-북방향 1곳 등 모두 3곳에서 조사되었다. 도로는 3차에 걸쳐 사용하였는데, 1차도로는 잔자갈을 사용하여 축조하였으며, 2차도로는 중앙에 자갈을 깔고 주위에 마사토를 다져 만들었다. 담장시설은 상부가 파괴되어 기초만 남아 있다. 담장폭이 가장 넓은 것은 0.95 m 정도이고 대부분은 0.8m 미만이다. 담장들은 집과 함께 개·보수, 증축된 흔적이 있다. 우물은 40여기가 조사되었으며, 일부는 배수시설(排水施設)이 딸려 있다. 깊이는 0.5m 에서 3.5m 정도까지 다양하다. 우물의 위치나 분포로 볼 때 대체로 한 가옥에 하나의 우물이 있었으며 도로에 가까운 담장에 연하여 굴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혈은 46기가 확인되었으며, 바닥에 기와를 깔거나 소토(燒土)가 남아 있는 것, 벽쪽으로 석열을 설치하고 소토로 다짐한 것, 돌로 아궁이를 설치한 것, 기둥구멍이 확인되는 것, 청동생산공방지로 추정되는 것 등이 있다. 청동공방지는 길이 2.65m, 너비 2.20m, 깊이 0.3m 정도로서 수혈유구의 내부 남동모서리에 청동 노(爐)를 설치하였다. 수혈의 남쪽 벽을 제외한 3면의 벽을 1.5㎝ 정도 두께로 황갈색점토를 발라 벽체를 만들었다. 바닥은 적색으로 소토화된 상태인데 단단하게 처리되었다.

수혈의 남동모서리에 붙여서 설치되어 있는 노적은 가로· 세로 60㎝의 정방형으로 부뚜막처럼 바닥으로 부터 10㎝가량 높게 되어 있다. 노적의 상면으로 부터 직경15㎝의 노를 설치하고 노의 밑면에 서쪽 방향으로 송풍구(送風口)를 마련하여 놓았다. 송풍구의 바닥은 수혈의 바닥보다 더 깊다. 수혈 내부에서는 많은 수의 도가니편과 청동찌꺼기, 와편(瓦片), 토기편 등이 출토되었으며, 잔자갈 크기의 구리광석과 청동 덩어리들도 수습되었다. 수혈유구의 남쪽편에 부정형(不定形)으로 흑갈색 부식토면이 노출되었고 내부에서는 다량의 도가니들이 출토되었다. 또 소량의 청동찌꺼기와 목탄(木炭)이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청동용해로(靑銅鎔解爐)일 가능성이 높다.

특징

동천동 일대는 주변의 황성동 및 용강동과 함께 신라 왕경의 북쪽 외곽에 해당하는 북천 이북지역으로 8세기가 되어 왕경 정비가 시작된 월성과 황룡사 부근의 중심부에서 점차 범위가 확장된 지역중 한 곳이다. 이 유적에서 중요한 점은 왕경도로를 포함한 우물, 청동공방지, 건물지 등이 함께 조성되었다는 사실이다. 특히 방로(坊路)의 중간에서 확인된 소로는 방(坊) 내부의 중간지점에 위치하므로 방 내부로 통하는 작은 골목길 역할을 해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청동공방지가 확인된 점으로 볼 때, 왕경의 외곽은 중심부와는 다르게 생산시설들이 다수 설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경주동천동도시유적은 신라왕경을 복원하는데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참고문헌

『경주 동천동 고대 도시유적-경주시 택지조성지구 내 7B/L-』 (경주대학교 박물관, 2009)
『왕경유적Ⅲ -경주시 동천동 7B/L내 유적-』(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박물관 연구총서 제 27책, 2005)
「경주 동천동7B/L유적내 청동생산공방지」(『영남고고학』 24, 1999)
「동천동 도시 유적 ·청동공방지」(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portal.nrich.go.kr/kor/archeologyUsrView.do?menuIdx=568&idx=3910)
집필자
장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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