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에서 2001년 8월 3일부터 2004년 2월 28일까지 조사하였다. 유적은 해발 74∼78m의 구릉 사면에 조성되었으며 동쪽 구릉(Ⅰ지구)과 서쪽 구릉(Ⅱ지구)이 서로 마주보고 위치한다. Ⅰ지구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26동, 삼국시대 주거지 2동, 삼국∼조선시대 분묘 76기 등 총 150기가 확인되었으며, Ⅱ지구에서는 청동기시대 주거지 52동, 구상유구(溝狀遺構) 5기, 원삼국∼삼국시대 주거지 279동, 수혈유구(竪穴遺構) 34기, 구상유구 4기, 토기군(土器群) 3기, 철기군(鐵器群) 1기, 고려∼조선시대 토광묘(土壙墓), 아궁이시설 등 총 423기가 조사되었다.
조사결과, 청동기시대 전기, 3-5세기대 주거지들이 분포하고 있는 유적으로서, 이 사이에 해당하는 유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이는 취락이 주변지역으로 이동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 원삼국-삼국시대 주거지의 경우는 4층 이상의 중복(重複) 층서(層序)를 나타내고 있어 시간적인 변화과정 속에서 주거지의 규모, 평면형태, 내부구조의 변화양상 등을 밝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이다. 주거지의 규모는 시간적인 변화를 겪으면서 50㎡ 이상의 대형주거지에서 30㎡ 미만의 소형주거지로 변화한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Ⅰ지구에서 26동, Ⅱ지구에서 49동, 총 75동으로서, 유적의 경사면에 입지하고 있다. 주거지의 평면형태는 장방형, 방형이며, 바닥은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한 것이 일반적이다. 내부시설은 노지, 벽구, 외구, 주혈이 있으며, 특징으로는 이중벽구(二重壁溝), 내구(內溝), 터널식 외부돌출구(外部突出溝) 등을 들 수 있다. 유물은 공열문(孔列文), 횡선문(橫線文), 구순각문목(口脣刻目文)의 단독문양과 공열문+구순각목문의 복합문양이 시문된 토기, 단도마연토기(丹塗磨硏土器), 삼각형만입석촉(三角形灣入石鏃), 일단경식석촉(一段莖式石鏃), ㄱ자형석도(ㄱ字形石刀), 반월형석도(半月形石刀) 등이 출토되었다.
원삼국-삼국시대 주거지는 평면 방형과 원형을 띠고 내부에 구들시설을 설치하였다. 구들시설은 점토만 사용하여 평면 ㄱ자형과 역S자형으로 북쪽에 주로 설치되었다. 아궁이 내부에는 솥받침이 설치되었으며, 주변에서는 취사(炊事)와 관련된 용기(容器)들이 출토되었다. 주거지의 부재(部材)는 점토, 목재, 초본류를 이용했으며, 화재로 폐기(廢棄)되었다. 유물은 노형토기, 대부광구호, 고배, 장경호, 주조철부, 도자형철기, 철겸, 지석 등이 출토되었으며, 중심연대는 3세기이다. 주거지는 3세기대에 집중적으로 조성되다가 4세기 이후부터 그 수가 점차 줄어들어 쇠퇴하였다.
청동기시대 주거지는 평면형태나 출토유물로 보아 포항 초곡리, 대련리, 원동, 인덕산유적, 울산 무거동, 옥현 유적 등 동남해안지방에서 나타나는 양식과 대비되며, 시기는 청동기시대 전기이다. 원삼국-삼국시대 주거지는 3-5세기 전반대로서 경산 임당, 경주 황성동, 기장 가동, 김해 봉황대유적과 유사하다. 청동기시대 주거지의 특징으로는 이중벽구, 내구, 터널식 외부돌출구 등이다. 원삼국-삼국시대 주거지는 내부에 구들시설을 설치하였다. 구들시설은 점토만 사용하여 평면 ㄱ자형과 역S자형으로 북쪽에 주로 설치되었다.
지금까지 포항지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 및 원삼국-삼국시대 취락유적 가운데 가장 대규모로서 당시 취락과 생활상을 복원하는 데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특히 원삼국-삼국시대 주거지의 경우는 4층 이상의 중복 층서를 나타내고 있어 시간적인 변화과정 속에서 주거지의 규모, 평면형태, 내부구조의 변화양상 등을 밝힐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