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임당택지개발사업에 따라 영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토성의 일부가 발굴조사되었다. 임당동토성은 2011년 사적으로 지정된 임당동고분군의 북쪽, F지구의 일부를 포함한 범위, G지구의 동쪽, Ⅰ지구의 남쪽에 걸쳐 축조되어 있다. 토성의 규모는 동-서 120m, 남-북 350m, 전체둘레 950m 정도(추정)이며, 해발고도는 59∼65m 정도에 위치한다. 타원형 또는 땅콩껍질처럼 중간이 약간 들어간 형태이며, 조사결과 토성은 4세기 전반에서 중반무렵에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남지방에서 삼국시대 토성의 출현은 대체로 4세기를 전후하며, 이때는 사로국이 신라로 발전하는 시기이다. 이 즈음 왕도인 경주에는 월성이 축조되며, 이후 신라의 영역 확대에 따라 지방의 주요 중심지에 토성이 설치된다. 토성의 설치 목적은 광역화된 지방을 지배하기 위해서인데, 경산임당동토성도 이런 연유에서 축조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임당동토성에 대한 조사는 두 구역에서 진행되었는데, F지구에서 180m, G지구에서 65m 정도이다. 기저부의 폭은 8.5∼9.5m 정도이며, 토성 축조시 판축틀의 버팀목인 영정주(永定柱)를 설치하기 위한 주공(柱空)은 성벽 기저부 상면에서부터 지름 30∼50㎝의 크기로 판 후, 지름 25㎝ 정도의 영정주를 폭 4.5m 정도로 대칭되게 두 줄로 세웠다.
토성의 내부에서는 초기철기시대 목관묘, 2∼3세기대에 설치된 취락 및 부속유구인 야외노지시설, 토기매납시설 등이 확인되었으며, 목관묘 이후 단계부터 분묘공간으로는 더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또한 토성의 직하에서는 2∼3세기대에 설치된 주거지들이 확인되었는데, 토성은 이 주거지들을 파괴하고 축조되었다.
토성의 영정주 내에서 도질토기편들이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하면 토성의 축조는 와질토기에서 도질토기 단계로 넘어가는 시점에 축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5세기부터 축조되기 시작하는 임당동고총고분군이 능선의 정상부에 입지하지 않고 중간부의 평탄지에 입지하는 것은 먼저 축조된 토성의 범위를 피해서 그 입지를 결정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이를 감안해 임당동토성의 축조를 추정해보면, 그 시기는 대략 4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며 늦추어 잡아도 4세기 중반경은 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당동토성은 야트막한 임당구릉의 서쪽 정상과 경사면의 지형을 따라 축조하였다. 이는 초기토성이 방어만을 위한 용도로 사용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성의 내부는 조사가 실시되지 않아 정확한 양상은 알 수 없으나 월성내부에 대한 탐사결과 등을 참조해보면 임당동토성의 내부에도 신라의 지방지배정책과 관련된 시설물들이 설치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즉 방어적인 성격과 지방지배정책을 위한 시설물인 관아시설 또는 지배자들의 주거역 등이다.
경산임당동토성은 신라의 영역확대에 따라 광역화된 지방을 지배하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소국(小國) 당시의 국읍(國邑) 내부에 설치한 토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