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과 2001년 군산시와 군산문화원, 2002년 군산시와 문화재청(현, 국가유산청)으로부터 발굴비를 지원 받아 학술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모두 세 차레의 발굴조사에서 마한의 분구묘와 주거지, 백제의 수혈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분, 토광묘 등이 조사되었다. 마한의 생활유적과 분묘유적, 백제의 분묘유적이 동일 유적에 자리하고 있는 복합유적이다.
대명산에서 남북으로 뻗은 산줄기 정상부에 마한의 생활유적과 분묘유적, 마한의 생활유적 위에 백제의 분묘유적이 들어서 서로 중복관계를 이루고 있다.
'가'지구에서는 분구묘와 옹관묘, '나'지구에서는 수혈식 석곽묘와 횡혈식 석실묘, 토광묘, 주거지 등이 조사되었다.
모두 4기의 수혈식 주거지는 풍화 암반층을 파내어 마련되었는데, 유구는 심하게 유실되어 대부분 바닥부분만 남아 있었다. 주거지는 그 평면형태가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북벽 또는 북서벽에서 소토부가 자리하고 있으며, 벽구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았다. 유물은 표면에 격자문과 승석문이 타날된 적갈색 연질토기편과 회청색 경질토기편, 방추차, 석기류 등이 섞여있다.
분구묘는 풍화 암반층을 거의 U자형으로 파내어 주구가 마련되었는데, 유구의 장축방향은 등고선과 평행되게 남북으로 두었다.
옹관묘는 합구식으로 풍화 암반층을 타원형으로 파낸 토광에 안치되었는데, 토광은 등고선과 평행되게 남북으로 장축방향을 두었다. 옹관은 경부가 길고 구연부가 직각으로 꺽이고 견부에는 거치문이 돌려져 있으며, 동체부에는 격자문이 시문되었다. 옹관의 저부는 일부러 깬 뒤 다른 옹관편을 수직으로 세워 막았다.
수혈식 석곽묘는 소형으로 산줄기 방향과 평행되게 남북으로 장축방향을 두었으며, 유물은 출토되지 않았다.
모두 7기의 횡혈식 석실분은 서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상태로 산줄기 정상부에 입지를 두었다. 묘광은 풍화 암반층을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파내어 마련되었는데, 유구의 장축방향은 일정하지 않고 각각의 고분이 약간씩 차이를 보인다. 벽석은 크기가 일정하지 않은 할석만을 가지고 쌓았는데, 벽석의 3단까지는 그 크기가 비교적 큰 석재로 쌓았다. 석실의 바닥면은 특별한 시설을 하지 않고 바닥면을 정연하게 다듬고 그 위에 점토를 바른 것으로 추정된다. 연도는 중앙부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 없고 오른쪽과 왼쪽에 둔 것이 반절씩 차지한다.
토광묘는 풍화 암반층을 파내어 묘광이 마련되었는데, 유구의 장축방향은 모두 산줄기와 일치되게 남북으로 두었다.
마한부터 백제까지의 생활유적과 분묘유적에서 600여 점의 유물의 출토되어, 군산을 중심으로 화려하게 꽃피웠던 해양문화의 역동성을 연구하는데 값진 고고학 자료를 제공해 주었다. 그리고 선사시대부터 줄곧 소금 생산으로 융성했던 군산의 발전상과 사회상을 일목요연하게 방증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