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민묘를 조성하는 과정에 우연히 유구와 유물이 확인되어, 당시 전북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져 횡혈식 석실분과 2기의 와관묘가 조사되었다.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은 그 조성시기가 6세기 후엽경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와관묘도 횡혈식 석실분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전북특별자치도 완주군 봉동읍 북쪽에 봉실산(372m)이 있는데, 이 산에서 서남 방향으로 뻗어내린 산줄기 남쪽 기슭에 유적이 자리하고 있다. 이 유적의 동쪽에서 만경강이 거의 U자형으로 휘감아 돌고 있으며, 남쪽 기슭 8부 능선상에 횡혈식 석실분이 위치한다.
횡혈식 석실분은 등고선과 직교되게 남북으로 장축방향을 두었으며, 봉분은 장축 6.4m, 단축 6m내외이다. 석실의 단벽과 장벽은 벽석의 축조방법에서 유사한 양상을 보였다. 단벽인 북벽은 대형의 판상석과 장대석을 각각 수직으로 세우고 그 위에 벽석은 약간 내경되게 더 올려놓았다. 장벽인 동벽과 서벽은 대형의 판상석을 수직으로 세우고 그 위에 두께 20cm 내외의 장대석을 가로쌓기방식으로 약간씩으로 안쪽으로 내경되게 쌓아올렸다. 남벽은 중앙부에서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연도가 마련되었다. 연도의 입구는 크고 작은 할석을 이용하여 견고하게 막았다. 석실의 바닥은 길이 10~20㎝의 판상형 할석을 가지고 입구 부분을 제외하고 전면에 깔았다.
석실 바닥면에서 금동이식을 중심으로 뚜껑 4점, 배 4점, 완 2점, 관고리, 관정, 꺽쇠 등의 유물과 함께 4인의 인골이 출토되었다. 모두 두 부부로 밝혀진 인골은 남성이 먼저 매장된 뒤 여성이 추가로 안치된 것으로 밝혀졌다. 인골의 유전자 분석이 불가능하여 친족 관계와 관련해서는상세하게 파악되지 않았다. 유구의 규모는 석실의 남북길이 285㎝, 동서너비 130㎝, 높이 105㎝이며, 연도는 길이 63㎝, 너비 83㎝, 높이 90㎝이다.
횡혈식 석실분 주변에서 2기의 와관묘가 조사되었는데, 와관묘는 생토면을 파내어 묘광을 마련한 뒤 그 내부에 기와로 무덤을 만들었다. 와관묘는 머리부분에 해당하는 단벽을 먼저 만든 뒤 장벽과 단벽, 바닥, 덮개 순서로 주영되었다. 유구의 장축방향은 1호의 경우 등고선과 직교되게, 2호는 등고선과 평행되게 두었다. 유물은 금동이식과 뚜껑, 완 등이 출토되었다. 유구와 유물의 속성은 서산 여미리 4호와 긴밀한 관련성을 보였다.
횡혈식 석실분에서 남녀 2쌍씩 모두 4인의 인골이 안치되어 있었는데, 모두 남자가 먼저 매장된 뒤 여성이 안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유전자 분석이 불가능하였지만 백제의 횡혈식 석실분에 인골이 수습되어 당시 사회상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고고학 자료로 추정된다.
석실에서 부부의 것으로 추정되는 4인의 인골이 확인되어, 당시 매장방법 및 매장풍습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 주었으며, 전북지역에서 처음으로 와관묘의 존재를 알린 점에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