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해주니콜라예프카성지는 니콜라예프카 마을에서 북쪽으로 200m 정도 떨어져 있고, 파르티잔스크 강 좌안에 위치한다. 기존에는 금(金)의 성터로 여겨졌으나, 1980년대에 성 안에서 ‘좌효위장군섭리계(左驍衛將軍聶利計)’라는 이름이 새겨진 물고기모양의 청동부절(靑銅符節)이 발견되어, 발해 시기의 성터로 밝혀졌다. 니콜라예프카성지는 발해 회원부(懷遠府)의 복주(福州) 또는 정리부(定理府)의 소재지 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성은 1871년 카파로프(P.Kafarov)의 보고로 알려졌고, 1950년대 이후에는 샤프쿠노프(E.V.Shavkunov)에 의해 부분적인 발굴이 이루어졌다.
성은 사다리꼴에 가까운 원형의 토성으로 내부 면적은 330,000㎡이다. 성벽은 10m 높이로 잘 남아 있지만, 강변 쪽은 절벽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따로 성벽을 쌓지 않고 일부 구간에만 낮은 토루를 쌓았다. 토루의 높이가 가장 높은 곳은 벼랑이 낮은 북서면의 중간 부분으로, 3.25m에 달한다.
성 전체의 둘레는 2.3㎞이고, 성벽이 축조된 부분은 1.55㎞이다. 성벽을 따라 안팎으로 해자(垓子)가 돌려져 있다. 밖의 것은 깊이 34m, 너비 2025m이며, 안의 것은 깊이 0.21.7m, 너비 34m이다. 성벽을 따라 12곳에 치(雉)가 설치되어 있다. 남쪽과 북동쪽에는 문이 하나씩 있는데, 옹성(甕城)을 설치하여 보호하였다. 문 앞에는 호(濠)가 있어 성을 드나들기 위한 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성 안의 동편에는 면적이 약 785㎡되는 장방형의 내성이 있다. 내성은 높이 1m 이하의 토루가 둘러져 있다. 내성 안에서는 금원과 건물터, 기와편과 벽돌편들이 발견되었고, 금대의 절터가 발굴되었다.
니콜라예프카성지는 그 구조나 출토 유물로 볼 때 발해 시기에 처음 만들어져 금대까지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중 치는 기존에 발해 성의 특징이 아닌 금대 성의 특징으로 보고, 금대에 이 성을 재사용하면서 축조한 것으로 보았다. 최근에는 치가 고구려에서부터 성의 주요한 방어시설로 축조되었기 때문에, 니콜라예프카성의 치 설치시기를 발해로 올려다보기도 한다.